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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내부자의 절실함이 있어

오멸 감독의 <뽕똘>에 감읍되는 까닭

지난해에 모 영화감독에게서 제주도 출신의 감독이 만든 희한한 영화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평론가로서 그런 영화를 챙겨보는 것은 의무라고, 만듦새에 상관없이 심금을 울리는 영화라고 그는 열변을 토했다. 그러겠노라고 답해놓고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잊어버렸다. 얼마 전 오멸 감독의 <뽕똘>을 보는데 그가 얘기했던 감독의 영화라는 걸 직감했다. 그가 말한 영화는 오멸의 첫 장편 <어이그, 저 귓것>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말한 오멸 영화의 장점이 <뽕똘>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이그, 저 귓것>을 보지 못했으나 전해주는 정서는 비슷할 거라고 예상한다. 종래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감성, 제주도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경험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에게 이입되는 것이 <뽕똘>의 매력이다.

낯선 공간, 낯선 캐릭터가 주는 충격

영화 초반부터 그런 건 아니다. 초반 약 20분간 이건 도대체 뭐 하자는 영화인가, 라는 의문이 뇌리에 맴돈다. 영화 만드는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어디서 주섬주섬 삼킨 B영화에 대한 자의식으로 내지르는 설익은 유희는 아닌가, 라는 삐딱한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그걸 상쇄하는 건 낯선 공간, 낯선 캐릭터가 주는 충격이다. 서울에서 온 무명배우 성필은 배우 오디션 공모 전단을 보고 전단에 적힌 영화사 사무실을 방문하는데 그곳은 지붕도 없는 버려진 폐가다. 감독이라는 작자(그가 주인공 뽕똘이다)는 영화사 건물 바깥에서 오줌을 누다 성필과 조우하고 이 황당한 만남은 더 황당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총제작자라는 사람은 감독에게 툭하면 욕질이고 그 곁의 여자 스탭 춘자는 어딘가 모자라는 듯한데 여주인공 자리까지 넘보는 중이다. 압권은 영화감독을 자칭하는 주인공 뽕똘이다. 버벅거리는 말투에 예술가의 아우라는 전혀 없는 인물인데 그 주제에 상대적으로 반듯한 외모의 소유자인 성필을 퇴짜 놓는다. 언어가 안된다는 이유로.

<뽕똘>의 엉성한 초반부는 영화 전체를 가늠하게 하는 안내판이다. 이 영화가 난센스 희극의 감성으로 전개되는 영화라는 것, 제주도에서 찍는다는 것, 주인공의 언어실력을 요구하는 감독 뽕똘의 예술적 고집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총제작자로부터 돈을 받기로 했던 뽕똘의 계산은 처음부터 어긋나고 애들 장난처럼 진행되던 영화촬영은 주연배우 성필이 마련한 100만원으로 어찌어찌 이어진다. ‘낚시영화’라는 제목이 붙은 그들의 영화는 전설의 돗돔을 낚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주인공이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내용인데 제작 여건상 돗돔 역은 춘자가 물고기 복장을 하고 대신하기로 한다. 바다에서 전체를 찍는 것이 온당하겠으나 역시 제작 여건상 주요 장면은 바닷가 얕은 곳에서 촬영하기로 한다. 심지어 클라이맥스는 활주로 비슷한 도로에서 찍기로 한다. 돗돔의 활기찬 움직임을 찍어야 하겠으나 돗돔 역의 춘자가 해낼 수 있는 몸연기의 한계 때문에 대충 넘어가기로 한다. 춘자는 여주인공 시켜준다더니 웬 물고기 역이냐고 투덜대고 감독 뽕똘은 얼굴을 많이 보여주는 여주인공 역인데도 싫다면 대역을 구하겠다고 협박한다.

<뽕똘>의 신기한 점은 비논리적인 황당무계 개그로 점철된 영화의 전반적인 주조에 슬픔이 깃들어 있음을 관객이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낄낄대고 웃는데 슬퍼지기 시작한다. 그 변곡점은 영화 중반에 스토리 전개와 무관하게 삽입된 ‘산방산 덕이 전설’ 시퀀스에서 이뤄진다. 영화 속 영화처럼 삽입된 이 전설에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오는 춘자를 업고 성필은 역시 그녀를 사랑하는 연적을 피해 산 아래로 달린다. “참 예쁜데 왜 이리 무겁느냐?”라고 투덜대던 성필이 실제로 느끼는 육체적 피로가 극에 달할 무렵, “도대체 뭘 처먹어서 이리 무겁냐?”고 성필이 다그치면 춘자는 “이슬…”이라고 답하는데 울화가 치민 성필이 내지른다. “참이슬이겠지….” 이 상황을 보고 푹 웃음이 터지지만 다음 장면에선 입이 다물어진다. 전설 속의 춘자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돌이 된다고 하소연하는데 정말 얼굴빛이 검어진다. 돌이 된 춘자에게 산방산의 샘물을 끼얹어주자 얼굴색이 돌아온다.

비수 같이 파고들어오는 아픔

코미디의 분위기에 불쑥 끼어드는 이 절실함, 불구의 고통을 치유할 샘물을 희구하는 마음은 ‘낚시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스탭들에게도 이입되고 그건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도 안되는 상황에 거부감을 보이던 성필은 점점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고 감독 뽕똘을 비롯해 모든 스탭들은 사이비 종교집단 신도들처럼 자신들의 사명에 젖어든다. 영화를 한창 찍고 있을 때 총제작자가 스탭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온 돗돔회를 방파제에 퍼질러 앉아 모두 먹으려 할 때 춘자는 울며 돗돔을 먹지 말라고, 우리를 구원해줄 물고기이니 먹어서는 안된다고 외친다. 영화의 부제를 ‘춘자의 눈물’이라고 붙이고 싶을 정도로, 이 장면은 보는 사람에게 힘찬 기운으로 웅변하는 느낌을 준다. 춘자의 눈물과 대구로 붙이고 싶은 장면은 후반부에 마침내 (춘자가 연기하는) 돗돔을 붙잡고 있던 끈이 끊어지면서 돗돔을 놓치게 된, 평생 돗돔과 씨름하다 머리가 허옇게 센 성필의 캐릭터가 슬퍼할 때다. 그는 비늘 한 조각이라도 주고 가라고, 우리를 그냥 두지 말라고 울면서 외친다.

토속적 애니미즘의 분위기가 슬쩍 비치는 이런 장면들 사이로 우리가 제주도에서 산다는 것의 기분을 짐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 말미에 ‘낚시영화’를 찍던 배우와 스탭들은 뽕똘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뽕똘은 그 모든 짓이 자파리라고, 제주도 말로 헛된 장난이라고 눙치고 넘어가지만 이 모든 것이 헛된 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 만들기, 나아가 예술창작의 의미에 관해 약간의 주석을 달아놓고 있지만 굳이 그걸 따지고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 헛헛한 짓거리에는 제주도 바깥에 사는 관객에게 뭔가 비수 같은 것이 파고들어오는 아픔을 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렇게 설정된 전설의 이야기를 소재로 자기들의 능력에 맞춰 창작을 했다. 이게 <뽕똘>이며, 영화 속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본질적으로 대동소이하다. 가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벌이는 유희 짓거리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은 제주도의 산하이며 거길 걷고 있는 듯한 유사체험이다. 뜻밖에도 이 체험은 강력하다.

<뽕똘>의 클라이맥스에는 외부인들이 잘 모르는 바닷가 비경이 나온다.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도 찬탄하고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장소는,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 촬영 이후에 훼손됐다. 올레길의 새로운 코스로 지정되면서 보도블록이 깔린 채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뽕똘>의 상영 이후에 만난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본토에 대해 느끼는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본토의 필요성에 따라 유배지로, 관광지로, 최근에는 군사기지로 논의되는 이 땅의 의미에 대해, 이 땅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그는 절실한 항의를 품고 있었다. <뽕똘>이 재미있는 것은 이런 얘기를 정색하지 않고 한다는 것이다. 대들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노는 기분으로 경박하게 만듦새를 의식하지 않고 즐기면서 하려는 듯한 외양을 갖고 있다. 굳이 진지한 척하지 않기 위해 경박을 감행하는 것도 대인배다운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놀면서 하겠다는 태도의 표명도 예술창작의 흥미로운 태도라고 느낀다.

예술이 대단한 것이라고 스스로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실제 삶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과연 얼마나 실제로 즐기면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연극 집단을 데리고 오멸 감독이 행한 이 자그마한 예술적 창작의 가치는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제주도의 공기, 땅, 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배어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그곳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을 열악한 제작조건 속에서도 즐기면서 해낸 것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볼 영화는 아니겠으나 <뽕똘>은 제주도 내부자의 시선과 기운으로 우리를 감읍하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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