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TView
[유선주의 TVIEW] 밥상에도 표정이 있어

키들키들 웃다가 슬픔이 목에 걸리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 SBS 일일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서 오윤아가 차리는 아침상에 눈이 갔다. 드라마 속에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며느리는 반드시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상을 준비하는데 시아버지와 기타 가족들은 보란 듯이 차린 아침상을 보란 듯이 외면한다. 이건 밥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한국 드라마의 공식 같은 장면이다. 포인트는 반찬 가짓수. 새로 무친 나물만 서너 가지에 얼핏 봐도 국과 김치를 포함해서 열 접시를 넘어간다. 며칠 건너뛰고 봤더니 오윤아는 여전히 아침상을 차리고 있다. 아침부터 기름 냄새 풍기며 시위하듯 부쳐냈을 호박전을 보니 조금 으스스하다. 하긴 예전에 봤던 아침드라마에선 곤경에 처한 며느리가 아침상에 잡채를 차려내더라.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TV 속 밥 먹는 장면들은 대개 김병욱 PD의 시트콤 안에 있다. 일상을 흔드는 한끼, 존재를 건 식탐의 풍경! SBS <순풍 산부인과>에서 영규와 미선은 언제 한번 들르시라는 학부모의 인사를 받고 도토리묵 한 접시를 먹기 위해 시외버스를 타고, 산과 계곡을 건너 외진 산골에 자리한 도토리묵 집에 당도한다. 기어코 주인을 불러 ‘지나가다 들렀다’고 체면치레를 하는 부부. 아! 쓰면서도 웃음이 나와 미칠 것 같다. SBS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노구는 허리를 다쳐 누운 아들 주현을 먹이려고 뷔페에서 몰래 음식을 담아온다. 온몸 구석구석에 숨겨온 뷔페의 음식들을 식탁이 가득 차도록 벌여놓는데 노구가 메고 있던 화구통을 뒤집으니 로브스터가 쑥 미끄러져 나온다. 그것을 감격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주현.

김병욱 PD의 시트콤은 한 끼니에 집요함과 주도면밀함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염치의 잣대를 무력화시켜 웃음을 끌어내는가 하면 터지는 감정을 꾹 눌러담는 데도 식사장면이 종종 이용된다. 새로 시작한 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사업이 망해 처남 집에 얹혀사는 내상은 예전에 빌려줬던 돈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기대를 품는다. 내상은 스트레스로 조기폐경이 온 아내 유선을 위해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한다. 두 사람이 에스카르고 전채를 먹으며 결혼기념일에 갔던 프랑스 어느 식당을 추억하는 사이, 내상에게 돈을 회수하기 어렵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는 내상의 뒷모습으로 통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유선, 그리고 실망을 감추려는 내상. 두 사람이 아련한 추억과 작은 기대가 무너진 참담함 속에서 서로를 위한 말을 고르는 사이 그 침묵를 가르는 것은 ‘오늘의 메인 필레미뇽 스테이크’다. “먹자. 당신 이거 좋아했잖아.” “애들도 데려왔으면 좋았을걸.” “나중에 데려오면 되지.” 둘 사이에 오가는 어떤 말도 지금의 처지를 뼈아프게 각인시킨다. 이윽고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은 조용히 고기를 썰고 천천히 씹어 삼킨다. 김병욱 PD의 전작 MBC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놀고먹던 가장 준하의 첫 출근과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사정상 준하를 해고한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준하가 생일 초를 끄자, 가족들 누구도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흐느낀다. 내상과 유선의 테이블에 놓인 필레미뇽 스테이크는 흐느끼던 준하네 식구들이 얼굴을 감추던 어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좀전엔 키들키들 웃었는데 이번엔 생각하는 것만으로 목구멍에 고기 조각이 걸린 기분이다. 아마 유선과 내상이라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 만찬을 기억하기 위해, 체하지 않도록 오래 천천히 씹어 넘기지 않았을까.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