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design+
[design+] 연쇄살인마의 과거로 향하는 출입구

<추격자>의 경사지붕 이층양옥집이 말해주는 것

<추격자>의 이층양옥집.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성곽처럼 쌓아올린 축대가 담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울창한 수목이 꾸부정한 자세로 집 앞 골목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대문 벽의 문패만큼은 이 요새의 주인이 누군지 알려준다.

누군가 문패 아래 놓인 초인종을 누르면 일련의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가정부가 인터폰을 받을 것이고, 통성명을 한 뒤 출입을 허가하면 “띠이”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의 잠금 장치가 찰깍 풀릴 것이다. 사자 모양의 손잡이를 밀면 대문은 녹슨 몸을 비틀며 거친 금속성의 마찰음을 토해낼 것이다. “끼이익.” 그다음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정원을 마주 대하는 것은 그 계단을 오르고 난 뒤다. 정원의 잔디밭 위에는 디딤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길 끝에는 경사지붕의 이층양옥이 우두커니 서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1930년대 후반생 건설업자 박동원 집사의 집이다.

한때 이런 고급주택이 도시 중산층의 꿈이었던 적이 있다. 그들에겐 언젠가 획득하게 될 출세의 전리품이자 스위트홈의 원형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작가 박완서는 전셋집을 찾아나선 30대 주부의 시선을 빌려서 이런 주택들이 “집 같지가 않고 고급 양과점 진열장 속의 데커레이션 케이크 같”다고 묘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좋았던 옛날이야기다. 아파트가 대세를 장악하자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나 초라하게 늙어버렸으니 말이다.

<추격자>의 이층양옥집.

그런데 그런 집들 중 하나인 박 집사의 집에 변고가 생긴다. 연쇄살인마 지영민이 등장하면서 실내는 인간 도축장으로, 정원은 암매장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지영민은 1975년생으로, 이 집이 신축되던 것과 유사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얼마 전에는 박 장로 집 아래 동네의 반지하방에 잠시 머물렀고, 3년 전에는 안양의 누나 집에 얹혀살았으며, 그 사이에는 교도소에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이전 과거를 추정해볼 수 있는 장면은 기동수사대 사무실에서 연출된다. 지영민은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망울을 한 채 ABC초콜릿을 오물거리고, 주의 산만한 초등학생의 표정으로 “어? 아홉 아닌데요, 열둘인데요”라고 답하며, 불량 청소년의 시건방진 말투로 “향수 안 뿌리셨네요. 생리하시나봐, 냄새가 비린 게”라고 여형사를 희롱한다. 그리고 마침내, 성불구 여부를 추궁하는 의사에게 “니가 뭘 안다구 떠들어”라고 윽박지름으로써 현재의 자신에게로 복귀한다.

이 각각의 레이어들이 겹치면서 직조해내는 시간의 질서가 혹시 감독조차 무관심하게 방치했던 지영민의 과거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박 장로의 집으로 표상된 경사지붕의 고급 주택은 그 과거로 통하는 출입구가 아닐까? 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지만 말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