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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오늘은 브래드 피트에 관해서만
김혜리 2011-12-02

베르너 헤어초크의 <악질경찰>이 나를 녹다운시킨 순간은, 로드킬당한 동족을 숨어서 바라보는 악어를 찍은 비디오 화면과 악어의 시점숏, 그리고 이구아나의 환각이 난데없이 등장한 때였다. 아벨 페라라의 동명 영화와 달리 헤어초크의 <악질경찰>은 구원에 관심이 없다. 아이러니와 미친 유머의 늪에서 자맥질할 뿐이다.

11월8일

손광주 감독의 영화 <캐릭터>는 신춘문예 출신 작가가 생계 때문에 인기 감독에게 고용되어 써내는 전형적인 시나리오와 그녀의 삭막한 현실을 병치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캐릭터>가 답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만인이 진부하다고 합의하는 픽션의 대표적 클리셰들을 진부하다고 재차 확언하는 일에 어떤 유익함이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영화의 첫 단락이 흥미롭기 위해서는 뻔하다고 여겨지지 않지만 알고 보면 뻔한 것들의 상투성을 끌어내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캐릭터>의 보다 치명적인 약점은 전형적 허구와 섬세하게 대조되어야 할 주인공 수연의 현실이 현대 젊은이의 권태와 창작자의 좌절에 관한 또 하나의 육중한 상투형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전작 세편이 연달아 500만 관객을 동원하고 버릇이 나빠진 극중 감독의 예술적 허영과 어리광은, 그가 수연에게 요구하는 멜로드라마의 각본과 견주어 어느 쪽이 더 진부한지 판별하기 힘들다. 나쁜 소식은, <캐릭터>처럼 독립예술영화군으로 분류되는 작품 속 클리셰는 관객으로서 상업영화의 그것보다 더욱 견디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극중 인물이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멍하니 시간을 끌다 받고, 수화기를 든 다음에도 한참을 뜸들였다 입을 떼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같은 설정이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지체인지 전달되지 않는다면 관객은 좀이 쑤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안티 크라이스트 밑에서 일하고 있어!” 극중 인물이 내지르는 비명이 선포하듯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는 직원을 사적인 욕구불만을 뱉어내는 타구(唾具)쯤으로 취급하는 병적인 보스들을 응징하는 복수극이다. 그러나 세스 고든 감독은 먹이사슬 아래쪽에 처한 약자들의 복수 충동과 행위의 결과보다, 서툰 네메시스인 주인공 ‘세 얼간이’의 작전이 연신 엎어지면서 일파만파 불어나는 소극에 더 관심이 있다. 직장상사로 인한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진지하게 대리 보상받기 원하는 관객에게는 이 영화에서 진상 보스의 일인으로 분한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16년 전 대동소이한 악역으로 출연한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를 대신 권하고 싶다. 감독의 의도가 그러하니만큼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도, 이야기보다 체면 차리지 않는 농담에 집중하게 되는데 압권은 성추행을 일삼는 색정광 의사로 분한 제니퍼 애니스톤과 대머리 분장으로 아버지 회사를 말아먹는 망나니를 연기하는 콜린 파렐의 존재 자체다. 정보없이 극장에 들어갔던 나는 우리의 ‘레이첼’을 첫 장면에서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파렐은 세 번째 등장할 때에야 비로소 의심하기 시작했다. 두 배우의 팬이라면 자신들의 스타가 계약 직전이나 촬영 전에 독주를 원샷한 게 아닐까 근심할지도 모른다. 한 인터뷰에서 나온 케빈 스페이시의 비방(?)이 적당한 마무리가 될 법하다. “아아, 콜린은 그냥 이번 영화에서 처음으로 메이크업을 안 했을 뿐입니다.”

11월13일

올해 칸영화제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이어 감독상 수상으로 과대평가 논란을 부른 <드라이브>를 보았다. 어쩌면 김지운 감독이 만들고 싶었을 법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낮에는 정비공과 스턴트맨으로 일하고 밤에는 범죄자 탈주 전문 운전사로 돈을 버는 (극중 이름조차 없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는, 무리에서 떨어진 이리처럼 살아가던 남자가 결코 인생 변수가 아니었던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혈겁에 휘말리고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활약으로 돌파해나간다는 면에서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와 나란한 길을 걷는다. 포즈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연기 스타일과 표현적으로 조율된 조명, 참신하고 자극적인 액션 연출 고안에 들인 공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드라이브>는 허를 찌르기 위해 노력하고 상당 수준 성공한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은, 카체이스를 주소재로 삼은 장르영화에 응당 따르는 약오른 맹수처럼 그르렁거리는 엔진의 신음과 아드레날린을 쥐어짜는 음악을 배제한다. 4분가량 실시간에 가깝게 연출된 오프닝의 자동차 도주신이 요약하는 대로, <드라이브>의 카체이스는 그저 더 빨리, 지그재그로 몰아대는 질주뿐만 아니라 느린 우회와 후진, 엄폐술까지 종합하는 리듬감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감정적 사건도 차 안에서 일어나는 바, 남녀 주인공의 감정은 운전 도중 드라이버와 조수석에 앉은 이웃집 여인의 손이 가만히 겹치는 순간 시작된다. 요컨대 <드라이브>의 제목은 흔히 이 장르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스피드 게임과 “드라이브 가자”라고 말할 때 그 단어가 뜻하는 고즈넉한 관조와 내성의 시간을 동시에 지칭하고 있는 셈이다.

11월14일

<머니볼>은 극장을 나서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국수를 삶는 중이라고 항의하건 말건 45분쯤 다짜고짜 수다를 떨게 부추기는, 그런 영화다. 작품에 관한 감탄 및 트집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브래드 피트에 관해서만 쓰자. 그는 감독이 수차례 교체되는 덜컹이는 프로덕션 과정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를 고수해 끝내 성사시킨 걸로 알려졌는데 탁월한 선구안이다. 메이저리그의 전통적 구단 운영 방식을 혁신하려고 하는 가난한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40대 단장 빌리 빈. 그는 브래드 피트가 지닌 장점의 목록에 골고루 빛을 던지는 캐릭터다. 그리고 시나리오는, 록 스타의 그것과 유사한 브래드 피트 연기의 섹시한 파괴력을 입증하는 장면으로 연신 ‘만루’를 이룬다.

브래드 피트는 배우가 되기 오래전 학창 시절부터 동급생 사이의 스타였다고 전해진다. 10대 시절부터 인기있는 아이였던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구김살없는 자신감은 과거 브래드 피트가 형상화한 많은 인물의 완성에 기여했는데 선수 출신다운 행동력과 결단력을 가진 빌리 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 유의할 대목은, 브래드 피트의 카리스마는 상대방을 쥐고 흔드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가 처한 공간을 환하게 비추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감독과 마찰하고 선수를 해고하는 일을 밥먹듯하는 빌리 빈이 아무리 야박하고 잔인한 말을 할 때에도 해맑게 활짝 열려 있는 채인 피트의 눈은 “나는 이 말을 함에 있어 주저와 부끄러움이 전혀 없어”라고 웅변함으로써 상대의 항변을 봉쇄해버린다. <오션스> 연작과 <머니볼>을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브래드 피트는 팝콘, 쿠키, 아이스크림 등 주전부리를 입에 달다시피하고 연기를 하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우적우적 먹는 행위만큼 인간을 어리고 무방비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거꾸로 “난 감출 게 없고 허세도 불필요하다”는 강단의 표현으로 읽힌다. 같은 맥락에서 책상이나 앞 좌석에 다리를 쭉 뻗어 걸치고 있는 격의없는 자세가 브래드 피트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도 없다. 반면 메이저리거로서 실패한 기억이 있는 빌리 빈은 게임의 예측 불가능성을 누구보다 알기에, 그리고 패배를 못 견뎌하기에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중계조차 껐다 켰다 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그럴 때면 브래드 피트의 뒤쪽 측면으로 돌아가 천진한 눈 옆에 숨어 있던 뺨의 주름과 살짝 튀어나와 희미한 응석이 어린 아랫입술의 실루엣을 보여준다. 노안으로 콧등에 안경을 걸친 극중 브래드 피트는 누차 지적됐듯 로버트 레드퍼드를 닮았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앞 세대와 구별되는 개방성과 장난기가 있다. 대사의 리듬감이 장점인 그가 상술한 모든 육체적 신호를 쏘아보내는 동시에 속사포 통화로 선수를 사고파는 장면은 서사와 무관한 별개의 영화적 클라이맥스를 만든다. <머니볼>의 브래드 피트는 너무나 종합적으로 매력있는 나머지, 다른 구단 소속이었던 통계의 귀재 피터 브랜드(조나 힐)가 빌리가 건넨 딱 한마디 이직 제의에 바로 짐을 싸는 급격한 전개도 이상하지 않다. 관객은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너도 반했구나?

각설하고 동시대 관객으로서 나는, 어차피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면 브래드 피트가 <머니볼>로 오스카 트로피를 안는 광경을 보고 싶다. 감량과 특수분장으로 브래드 피트인지 베니치오 델 토로인지 분간할 수 없는 변신을 하거나 경천동지할 휴먼 감동 연기를 해서, 혹은 실존 인물을 무덤에서 불러내는 묘기를 부려서가 아니라 100%의 브래드 피트로서 재즈 뮤지션처럼 분방하게 타고난 매력을 햇살처럼 찬란히 흩뿌리는 연기로 말미암아 이 스타가 길이 기념되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가 스크린에서 가장 초월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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