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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감각을 건드리는 파편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1-12-09

파편과 예술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네빌을 살해한 마스크의 사내들이 죽은 네빌의 옷을 벗기며 말한다. “불투명한 알레고리의 애매모호한 증거로서 영지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놓거나.” 이 대사가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암시한다. 영화에서 이 살인의 의미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사태의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들만 “불투명한 알레고리의 애매모호한 증거로서” 영화 전체에 흩어진다. 마치 살인자들에게 벗겨져 여기저기 버려질 네빌의 옷들처럼.

파편에 대한 취향

동전의 양면이랄까? 철학에서 17세기가 합리주의로 특징지어지는 고전주의 시대였다면, 예술에서 17세기는 비합리주의로 특징지어지는 바로크 시대였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영화 속에서 한 시대에 공존하던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을 서로 충동시킨다. 가령 격자를 이용해 르네상스의 투시법을 과학적으로 실현한 네빌의 풍경화는 합리주의적 사유를 상징한다. 푸코라면 그것을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의 그림이라 불렀을 거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식은 늘 명석하고 판명해야 한다. 반면, 이 영화에서 살인의 의미를 말해줄 단서들은 영화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진다. 물론 그 파편들은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스토리를 이루지는 않는다. 여기서 사건의 의미는 명석판명하지 않다. 범죄를 다룬 추리영화에서는 흩어진 단서들이 범행의 동기나 과정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플롯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의문으로 남아 있던 부분들도 결말에서는 스토리라는 실에 꿰어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곤 한다.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은 다르다. 그것은 추리물이 아니다.

<독일비극의 근원>(1928)에서 발터 베냐민은 고전주의적 합리성에 “알레고리적 문자그림이 보여주는 무정형의 파편”을 대비시킨다. 이 파편에 대한 취향은 아마도 이성주의의 전체화하는 경향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을 거다. 헤겔은 언젠가 “진리는 체계”라고 말한 바 있다. 한마디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파편들은 궁극적으로 전체 속에 편입되어 그 안에서 의미를 얻어야 한다는 얘기. 파편들을 전체로 집약하는 이 강박에 대한 반발에서 전체를 다시 파편들로 해체하려는 충동이 나온 게 아닐까?

바로크의 이 알레고리 취향은 낭만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으로 이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큐비즘이다. 가령 ‘분석적’ 단계의 큐비즘에서 대상은 그리드를 닮은 파편들로 해체되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어진다. 그저 파편들이 원형을 막연히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더이상의 해체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그들은 화면에 파편들을 ‘콜라주’하여 전체를 구축하는 입체주의의 ‘종합적’ 단계로 이행한다. 파편은 다시 전체 속에 갇힌다.

발터 베냐민은 연극과 구별되는 영화의 파편성을 강조한다. 연극은 유기적 전체이나, 영화는 짧은 숏들을 이어붙인 파편적 장르. 한마디로 그것은 ‘몽타주’다. 하지만 영화도 그리피스처럼 연속적 편집(continuity editing)을 하거나, 에이젠슈테인처럼 불연속 편집(discontinuity editing)을 할 수 있다. 전자가 고전적이라면, 후자는 현대적이다. 숏과 숏의 충돌이 서사로부터 다소 독립적인 미학적 효과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는 그리피스의 것보다 훨씬 더 파편적이다.

물론 그리피스의 것이나 에이젠슈테인의 것이나 어차피 전체(서사)에 종속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전체와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파편은 ‘상징’(symbol)이다. ‘상징’은 그리스어 ‘심발레인’(symbalein)-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나중에 서로 알아보기 위해 둘로 쪼개어 나눠 갖던 도자기(혹은 거울)의 파편- 을 의미했다. 여기서 파편은 다른 짝을, 나아가 그 둘로 이루어진 전체를 지시할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으로든(해체), 긍정적으로든(종합), 파편은 늘 전체를 암시, 혹은 명시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뤽 낭시는 이와는 좀 다른 파편의 개념을 제시한다. 상징이 아닌 파편, 즉 상징으로 기능하지 않는 파편이 그것이다. 불어에 ‘감각의 터치’(touche des sens)라는 말이 있다. 가령 어떤 예술작품을 본다 하자. 그때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그것의 색채나 형태나 질감과 같은 현상학적 질(qualia)에 사로잡힌다면, 그때 당신은 ‘감각의 터치’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장 뤽 낭시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그 어떤 상징체계로도 포섭되지 않는 이 터치를 전달하는 데에 있다.

감각의 터치

‘감각의 터치’는 주객 분리 이전의 것이다. 가령 우리가 손으로 수도꼭지를 만진다고 하자. ‘이 차가움은 주관(손)에 속하는가? 아니면 객관(수도꼭지)에 속하는가?’ 수도꼭지의 차가움을 느끼며 굳이 이렇게 물어야 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의 감각 속에서 나와 세계는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을 거다. 그때 감각된 그것은 내 밖에 있으면서(transcendent) 동시에 내 안에 들어와 있다(immanent). 즉 그것은 ‘초월적-내재적’(trans-immanent)이다. 한때 세계는 우리에게 그렇게 열렸었다.

태어난 지 10개월쯤 됐을 때 우리 아이는 처음으로 얼굴에 눈송이를 맞고는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다음날, 밖에 데리고 나가 쌓인 눈 위에 내려놓았더니 온통 하얗게 변한 세상이 무서웠던지 그만 ‘으앙’ 하고 울어버린다.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세계는 아직 언어적으로 분절되지 않은 상태였을 거다. 그때 아이는 시각적, 촉각적 자극에서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자라는 과정에서 감각을 지각으로 대체해가며 녀석은 아마 아기 시절에 가졌던 세계의 그 원초적 느낌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이 ‘감각의 터치’를 다시 느끼게 해준다. 이 체험을 가리키는 데에 다양한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가령 ‘존재자를 나타나게 하는 존재의 사건’(하이데거), ‘주객 이전의 사상 자체’(후세를), ‘지각 이전의 원초적 감각’(들뢰즈) 등등. 항상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예술작품을 보며 실제로 이 ‘감각의 터치’를 느낄 때가 있다. 가령 라벤나 성당 모자이크의 그린, 고흐의 해바라기의 옐로, 이브 클라인의 블루가 주는 즐거운 경이를 과연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감각의 터치로서 예술작품은 이렇게 그 어떤 상징체계로도 편입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은 기존의 상징체계에 균열을 낸다. 장 뤽 낭시는 감각의 터치를 일으키는 작품을 ‘파편’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파편은 미리 존재하는 어떤 전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그 어떤 전체도 암시하거나 명시하지 않는다. 전체와 관계없는 그냥 파편, 유일자로서 절대적 파편, 라캉의 어법을 빌리면, 실재계에서 뚝 떨어져나와 그 어떤 상징계로도 포섭되지 않는 파편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 로스코의 작품은 이 감각을 건드리는 파편의 좋은 예가 아닐까? 로스코는 제 작품에 대한 일체의 해석을 거부한다. 단색의 배경에 거대한 색채 덩어리. 거기에 딱히 해석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말레비치나 칸딘스키처럼 거기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로스코는 그저 관객이 작품을 바로 코앞에 둔 상태에서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에게 확신을 준 것은 어느 여성관객. 그녀는 그 색 덩어리 앞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터치’(touch)는 동시에 ‘감동’(touc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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