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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취향] 농부의 꿈
2011-12-09

고등학생 때 내 꿈은 농촌 총각에게 시집가는 거였다. 그때는 농협에 취직하면 농부를 알게 되고, 수협에 취직하면 어부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양촌리 김 회장댁 막내 며느리쯤은 충분히 내 자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농협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졌으며, 농촌 총각도 농협과 그닥 긴밀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나의 체력과 게으름이 결과적으론 고귀한 농가와 멀쩡한 농촌 총각 하나 살렸구나 싶다.

올봄 우연한 기회에 도시농부학교 실습농장 귀퉁이에 작은 밭을 얻게 되었다. 처음 오이씨, 호박씨 심는 걸로 본격 흙놀이(농사라고 부르기엔 양심에 찔리는 바가 많다)가 시작됐다. 코를 막아가며 퇴비를 섞고,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나오는 잡초를 뽑는 게 쉽지 않았다. 장갑이 축축해지도록 벌레는 눌러 죽이는 일, 매주 늘어가는 눈 밑 기미는 슬프기까지 했다.

멋모르고 시작한 흙놀이가 나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은 뒤 벌건 얼굴로 원두막에 앉아 마시는 막걸리를 최고급 바에서 마시는 와인에 비할까. 또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남의 밭의 부추를 몰래 자르고, 풋고추 넣어서 아무렇게나 부쳐먹는 전과 라면은 여느 한정식이 부럽지 않고, 같이 흙놀이하는 사람들이라도 몇몇 모일라치면 지천에 아무렇게나 널린 돌판에 구워먹는 삼겹살과 소주…. 내 밭의 상추, 깻잎은 실크스카프처럼 보드랍고, 강낭콩과 완두콩은 진주처럼 아름답고, 마늘은 사탕만큼 달고 반짝이며, 감자를 캐는 일은 흙 속에서 보물이 나오는 것처럼 신이 났다.

주말마다 출근 도장을 찍으며 그저 흙놀이 선배들이 씨 뿌려라, 옮겨 심어라, 밭 매라, 걷어라, 밭 갈아엎고 다른 거 뿌려라… 알려주는 대로 따라만 했는데도 1년이 금세 지나가버렸다.

지난 주말 1년간의 흙놀이를 마감했다. 배추, 무, 총각무, 쪽파를 뽑아 김장을 했다. 벌레 먹고 못생기고 크기도 들쭉날쭉한 그것들이 만기된 적금처럼 날 행복하게 했다. 농부님들은 이런 맛에 그간의 고생 다 잊고, 다시 한번 마음 설레며 내년을 준비하는 것일까. 창고에 그득 채워놓고 겨울을 날 만큼의 양식은 거두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내년 텃밭 계획으로 벌써 바쁘다. 내년엔 땅을 몇평 더 일궈서 마늘을 한구석에 잔뜩 심어볼까, 고라니만 좋은 일 시킨 쌈야채랑은 접을까, 그래도 삼겹살의 단짝 상추만은 포기할 수 없지….

비록 초년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서울에서 샐러리맨으로 나이 먹어가고 있지만 이렇게 10년 뒤쯤이면 새로운 꿈인 ‘게으른 한량 농부’로 자리잡지 않을까. 그때쯤 삼겹살과 소주 사들고 우리 집에 놀러들 오시라, 마트에서 산 채소와는 질적으로 다른 노지 상추 무한 리필 가능!

글 김윤희 <씨네21> 디자인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