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생각도감
어눌하다, 그러나 섬뜩했다 <비욘드>
2002-01-16

민동현의 오! 컬트

청계천 황학동에 가면 마치 내가 인디아나 존스가 되어 고대유적지를 탐험하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양복에서 양말까지 없는 옷들이 없고, 돌돌 말아져서 팔리는 고미술품들 하며 각종 액세서리에다 귀하디 귀한 LP판들까지 진귀한 옛 물건들로 가득한 황학동에서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헌 비디오 테이프들이다. 황학동 바깥쪽 큰길가에 쭉 늘어선 비디오 가게들은 새로 나온 비디오에서부터 헌 비디오까지 다양한 영화들로 가득한데 가게마다 바깥쪽에 온갖 먼지가 가득한 채 버려두다시피 한 테이프들이 있다.

대개 4개에 2천원에서부터 어떤 것은 3개에 1천원까지 파격적인 가격에 거래되곤 하는데, 가게 주인들이 오래되고 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싼값에 내놓은 것이다. 이런 테이프들은 옛날 에로영화에서부터 출처불분명한 액션영화들 그리고 다수의 홍콩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열심히 먼지를 닦아가며 찾다보면 귀하디 귀한 보물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것은 가격 대 성능비의 경제적인 가치평가보다는 남들이 쉽게 지나치고 간 쓰레기더미 속에서 나만의 귀한 보물을 찾아내는 뿌듯함이 있기에 어떤 결과를 떠나서 과정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이탈리아 대표 호러영화감독 중 한명인 루치오 풀치의 <비욘드>(The Beyond)도 실컷 먼지를 마셔가며 황학동에서 찾아낸 나만의 보물 가운데 하나다. 대개의 호러영화를 보면 낡은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많다. 새로운 집이라도 이전에 공동묘지였던 곳에 세워졌다거나 정신병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든지 해서 악마의 저주나 유령이 사는 뭐 그런 공간이고, 주인공은 이사를 왔거나 유산으로 집을 상속받아 찾아오게 된다. <비욘드>도 그러한 익숙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진부할 수도 있지만,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솔직히 난 체질상 겁이 많아서 호러영화를 잘 보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이상하리만큼 이불을 뒤집어쓰며 보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러고보면 난 호러영화감독들이 가장 좋아할 관객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모든 장면에 지레 놀라주고 겁내주는데 감독들 입장에서 얼마나 예쁘겠는가?

그만큼 겁을 내면서도 내가 꾸준히 호러영화를 봐온 것은 아마 동일한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새롭게 창조해내려고 애쓰는 감독들의 창의적인 노력의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비욘드>는 매우 독특한 느낌의 영화이다. 솔직히 이 영화는 그리 무섭지 않다. 잔인한 장면도 없고 뛰어난 장면 연출이나 피가 낭자하지도 않다. 그리고 1981년 영화여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어눌하며 우습기까지 하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섬뜩한 느낌이 가슴 가득 파고들어와 오랜 여운을 남긴다.

내가 아는 어떤 호러영화 광 팬은 미국 호러영화와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차이점을 날카로운 칼과 뭉툭한 연필에 빗대 이야기한 적이 있다. 빠른 편집과 잘 짜여진 구성의 미국 호러가 종이를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느낌이라면 투박하고 낡은 듯한 편집에 거친 카메라 움직임 등의 이탈리아 호러는 뭉툭한 연필로 종이를 자르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전자가 날카롭게 종이가 잘리는 것에 비해서 후자는 날카롭지 않은 연필로 자르는 것이기에 갈기갈기 찢어져서 잘리게 되는데 이런 느낌이 앞의 칼로 잘리는 것보다 더욱 큰 공포감과 느낌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반짝이며 휘황찬란한 백화점보단 낡고 지저분한 듯하지만 사람냄새 나는 황학동이 더욱 기억에 남고 가고 싶어지는 이유가 말이다. 그러고보니 <비욘드>의 괴물은 우습긴 해도 진지했던 듯싶다.

민동현/ 단편영화 <지우개 따먹기> <외계의 제19호 계획>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