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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구]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할 소년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2-02-09

<해를 품은 달> 여진구

열여섯. 겉으로도 속으로도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나이다. 여진구는 올해 열여섯이 됐다. 변성기를 지나 목소리는 이미 ‘남자’다. ‘으하하하’ 웃음을 터뜨릴 땐 영락없는 아이다. ‘-습니다’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땐 어른, “수학이나 영어는 과외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땐 또 고만고만한 이 땅의 평범한 청소년이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왕세자 이훤의 나이도 본인과 엇비슷한 열다섯이었다. 열다섯의 왕세자는 궁궐의 담을 넘으려다 평생을 가슴에 묻어야 할 첫사랑과 만나고, 세상에서 가장 영특해 보이는 그 열세살 소녀는 ‘죽음’으로 왕세자의 가슴에 피멍을 들인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결국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어린 왕. 여진구는 그런 왕이 돼야 했다.

기품있는 왕세자와 천진한 소년 사이

여진구에겐, 일개 무사(드라마 <일지매> <무사 백동수> <뿌리깊은 나무>, 영화 <쌍화점>)에서 왕으로의 신분상승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정말 재밌더라고요. 그런데 점점 부담이 되는 거예요. ‘내가 잘 소화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고민도 되고. 여태까지는 장난기가 많거나 진지하기만 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이번엔 무겁기도 하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라 좀 오락가락해야 하잖아요. 새로운 연기 스타일을 시도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본인의 우려와 달리 여진구는 왕세자의 기품과 소년의 천진함을 능청스럽게 오갔다. 눈썹을 씰룩이며 내관 형선에게 “어명이다, 어명이래도”라며 명을 하달할 때 그랬고, 연우에게 차마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어 “나는 조선의… 내관이다”라며 ‘도둑 내시’로 오인받을 때도 그랬다.

첫사랑의 설렘과 상실의 아픔이라는 진폭 큰 감정을 표현해야 했을 때도 여진구는 이훤의 마음을 비약없이 전해주었다. “잊어달라 하였느냐. 잊어주길 바라느냐. 미안하구나. 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는 이훤의 고백은 많은 누나팬들의 죽어 있는 연애세포를 깨웠다. 촬영장에선 김도훈 감독이 먼저 예견했다. “나례진연에서 고백하는 장면 찍을 때 너무 어려웠어요. 문장이 그렇게 길진 않은데 훤의 마음이 다 담겨 있는 대사거든요. 그런데 진지하게 하면 느끼할 것 같고, 웃으면서 고백하자니 장난스럽고…. 감독님이랑 계속 상의했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진구야, 이병헌이 돼봐라.’ 무슨 얘기인가 헷갈려하니까 다시 말씀해주셨어요.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여심을 흔드는 이유는, (감정을) 꽉 잡고 가다가 순간 풀었다가 다시 꽉 잡고 가니까 그 연기의 강약에, 감정의 강약에 여자들이 빠지는 것 같아. 너도 그렇게 한번 해보자.’ 그 말을 듣고도 몇번 NG를 냈어요. 그러다 진지한 순간에 쓰윽 한번 웃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그렇게 했는데 감독님이 흡족해하시면서 한마디 던지시더라고요. ‘이제 이 나라 누나들 다 네 거야!’ 으하하하.”

극중에선 지상 최고의 로맨티스트 왕세자지만 현실에선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조차 쑥스러워 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아들이다. “좋아하는 여자애는 있었지만” 정식으로 연애 한번 해본 적 없는 ‘모태 솔로’이기도 하다. 그러니 촬영장에서만큼은 철저히 이훤으로 살았다는 얘기다. 아닌 게 아니라, 연우의 죽음을 전후로 오열하는 이훤의 모습을 촬영할 때 그는 ‘이번만큼은 훤이 되어보자’고 마음먹었단다. “계속 대본만 읽었어요. 훤의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어요.” 충혈된 두눈에 어린 먹먹함, 사무침과 같은 감정들은 이것이 과연 십대 소년의 것이 맞는가 싶을 만큼 절절했다. 당연히 그 ‘옥루’는 ‘인공’ 눈물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너, 안약 쓴 거지? (웃음) 여태까지 안약 쓴 적 없어요. 순수하게 제 눈물이었어요. 그런 신이 있는 날이면 되도록 덜 장난치고, 덜 말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어요.” 그 눈물에 밴 감정은 진짜였다.

그런 의미로 여진구는 ‘잘’ 운다. 여진구는 우는 연기를 잘해서 배우로 데뷔할 수 있었다. 아홉살에 찍은 데뷔작 <새드무비> 오디션장에서 그는 엄마를 잃은 슬픔을 표현해야 했다. 휘찬 역을 꿰차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한 다른 아역배우들은 속으로 흑흑 울었다는데, 그는 ‘엄마~’를 외치며 엉엉 울었단다. 그러곤 <새드무비>의 한 에피소드를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남다른 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기 일쑤인 소심한 아이였지만 여진구는 어느 순간 연기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연기는 그에게 한번도 지루함을 안겨준 적이 없다. “쉽게 질리는 성격인데 연기는 안 질리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연구해야 하고, (예전 캐릭터를) 버리고 다시 연구해야 하는 게 재밌어요.” 다행히 슬럼프도, 사춘기도 “촬영하며 지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스윽 지나간 것 같다”고 한다.

성인 역할, 해보고 싶다

<자이언트> <쌍화점>을 찍으면서 만난 김명민, 조인성 같은 배우들은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기에 그만이었다. <자이언트>를 통해 철도 들었고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었다는 여진구는 그때 ‘김명민 선배님을 따라가자’고 생각했다.

그는 <쌍화점>의 조인성을 “키가 그렇게 큰데도 인사할 때는 몸이 기역자로 꺾이는 굉장히 멋있는 형”으로 기억한다. 현장에서 일일이 스탭들을 챙기던 조인성에게서 인성과 태도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부모님이 항상 강조하는 것도 “겸손”이다. “무슨 역을 맡든 얼마만큼 뜨든 겸손해져야 한다고 그러세요.” 그래서일까. 학교 친구들에게 여진구는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연예인’이 아니다. 그는 되레 “사인요? 친구들은 제가 줘도 안 받아요”라고 말한다. 전교부회장이라는 타이틀이나 전교 50등이라는 성적 얘기로 화제가 된 일이 본인은 그저 황당하고 쑥스러운 눈치다. 조금 삐뚤어져도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여진구는 대나무처럼 곧게 성장하고 있었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다고 누차 강조한 여진구는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해보고 싶고 성인이 되면 운전면허를 딸 거란다. “군대도 가보고 싶어요.” 재밌는 대답이 또 이어진다. “고등학생 때 성인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맞지도 않는 아버지 양복을 입은 것처럼 어른 ‘흉내’내는 건 그가 더 못 견딜 일이다. 아역배우의 고민 혹은 목표를 압축한 것 같은 저 말은 아마도 특정한 시기에 해야만 의미있는 일들을 자기 안에 축적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새로운 연기에 대한 목마름을 간직한 채 언젠가 주어질 기회를 ‘적극적으로’ 기다리겠다는 의미. 여진구는 당분간 학교생활에 충실할 거라고 했다. 배우 여진구의 모습은 하반기에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잊으려 하였으나 잊지 못하였다’는 이훤의 대사처럼, 해를 품은 소년의 모습을 우리는 오래 기억할 것이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양이 될 때까지, 그 변태(變態)의 시간을 참을성있게 지켜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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