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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세종은 왜 자꾸 등장할까
강병진 2012-02-28

사극에서 드러나는 대중의 정치적 열망과 쾌감

<뿌리 깊은 나무>

“정치가 먼저가 아니라 분노가 먼저입니다.” <선덕여왕> 속 유신랑의 말이 아찔했다. “그럼 나중에는 궁궐로 쳐들어가는 거예요?” <추노>의 초복이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던진 질문에, 업복이는 사색이 됐고 보는 이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선덕여왕>과 <추노>는 각각 2009년과 2010년에 방영된 사극이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굳이 돌이킬 필요는 없다. 그저 당시의 정치 현실이 국민에게 안긴 아픔이 있었고, 할 수 있는 게 촛불을 켜는 것뿐이었다는 것만 떠올려보자. 심간(心間)의 고통이 있었으나, 정치와 이성의 논리 때문에 차마 구중(口中)에 올리기는 어려웠던 역심(逆心)의 말들이 많았다. 그것을 당대의 사극이 먼저 내뱉어준 것이다. 배설의 쾌감과 다를 게 없었다.

사극의 전성과 쇠락이 현실정치의 국면을 따른다는 건 가설이 아닌 정설이다. 1980년대에는 <조선왕조 오백년>이 금기의 영역을 건드린 반면,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0년대에는 <용의 눈물>(1996) 이전까지 내세울 만한 사극이 없었다.

사극은 현실정치를 담으려 하고, 보는 이들은 그를 통해 쾌감을 얻고 때로는 먼저 정치적 함의를 읽으려 애쓴다(<뿌리 깊은 나무>의 ‘밀본’에서 우리는 어떤 이니셜을 떠올렸던가). 비단 현 정권에서 나온 사극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전 정권의 시기에 나온 <대장금>에서도 ‘다리를 저는’ 정 상궁과 그녀의 제자인 한 상궁에서 사람들은 두명의 대통령을 떠올렸다. 최고상궁에 오르고도 음모에 의해 다시 경연을 벌여야 했던 한 상궁의 처지에서는 ‘한상궁 재신임’을 이야기했다. 사극은 ‘누군가’에 빗댈 수 있는 명징한 은유를 제공하면서, 정치적 논의의 쾌감을 증폭시킨다. 사극이 아니라 현대극이었다면, 은유가 아니라 패러디로 보이지 않았을까? 잠룡들의 시대인 지금, 사극 속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에서도 유독 ‘왕’의 캐릭터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 설명하시옵소서.”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을 향한 소이의 한마디는 저릿했다. 만약 그때 ‘그’에게도 저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래서 정말 온 힘을 다해 설명했다면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어땠을까. 한편, 소이의 말은 이제 머지않은 시점에 찾아올 누군가를 향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바람이기도 하다. <뿌리 깊은 나무>의 등장이 그처럼 과거에 대한 환기인 동시에 새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읽혔다면, 지난 몇년간의 사극은 우리가 만난 대통령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연상시켰다. <이산>의 정조, <한성별곡-正>의 정조,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의 정조. 개혁적 비전을 지녔으나, 수구세력의 벽에 부딪혔던 <조선왕조실록> 속의 정조와 카리스마와 지혜로 상대세력을 견제하는 사극 속의 정조가 한데 엮여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드라마 속 비중은 적지만 <추노>의 인조 또한 마찬가지다. 왕의 무능함이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던 백성이 세상을 뒤엎으려 하는 상황에서 어찌됐건 인조 또한 현실정치를 상기시키는 왕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끊임없이 백성의 안위를 살피는 왕의 모습이 정치를 넘어 아예 일상적인 판타지가 된 상황이다. 로맨스의 주인공인 <해를 품은 달>의 이훤조차도 그런 열망의 캐릭터다. 정조와 세종의 결이 조금씩 겹쳐진 그는 “왕인데도 이 정도나 생긴”터라 더욱더 판타지적인 군주다. 흥미로운 건, 제작진의 의도와 상관없이 보는 이들의 시선이 알아서 그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극이 현실을 품은 것일까, 보는 이들이 사극을 거울삼아 현실을 비추고자 한 걸까. 선후관계로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은 후자의 열망이 더 큰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극의 전성시대가 지닌 불편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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