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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2-03-01

<열여덟, 열아홉> 백진희

반팔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팔에 살짝 닭살이 돋았다. 가느다란 두팔을 쓸어내리며 백진희가 말한다. “체력이 워낙 좋아서 밤새워도 끄떡없고, 보기보다 튼튼해요.” 통통할 것 같던 볼살도 어디다 숨겨놓고 온 것 같았다. “다들 그러세요. 실제로 보면 되게 홀쭉하다고.” 역시, 백진희는 배반의 쾌감을 안겨주는 배우다.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에서의 밝고 꿋꿋한 모습을 현실의 백진희에게 대입했다가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종종 캐릭터와 배우를 하나의 인물로 오해하곤 한다. <하이킥3>는 일주일에 5일이나 방송되는 데다 극중 캐릭터의 이름과 실제 배우의 이름이 같아 더더욱 그런 오해를 살 법하다. “실제로는 말도 그렇게 많지 않아요. ‘무슨 일 있어?’, ‘힘없어 보이네’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그게 원래 제 모습인데, 요즘 들어 저도 좀 헷갈리는 것 같아요. 원래의 내가 어땠지? 그리고 저 안 당 돌한데…. <하이킥3> 식구들이 저보고 소심하대요.” 나른한, 실은 잠을 못 자 졸린 표정으로 소곤소곤 얘기하는 백진희의 모습이 확실히 어색하긴 했다. 고기라도 앞에 있으면 “우와~ 고기다, 고기!”라고 외쳤을까?

“저, 안 당돌해요”

‘안 당돌한데’라는 말이 나온 건 <하이킥3> 이전에 찍은 <반두비>와 <페스티발> 때문이다. <반두비>에서 백진희는 안마시술소에서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원어민 영어강사의 수업을 듣는 여고생 민서였고, <페스티발>에서 백진희는 짝사랑하는 어묵가게 아저씨를 꼬이려고 피로회복제에 흥분제를 타먹이는 여고생 자혜였다. 동안의 요소를 고루 갖춘 그녀에게서 쉽게 연상되는 캐릭터는 절대 아니다. 결과적으로 교복을 입은 민서와 자혜가 누군가의 성적인 대상이 되고자 애쓸 때, 그 충격효과는 배가 됐다. 3년 만에 개봉하는 <열여덟, 열아홉>에서 백진희가 연기하는 서야 역시 그리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다. 역시나 교복을 입고, 사랑을 갈구한다. 이번엔 그 대상이 이란성쌍둥이 오빠다. 그러니 88만원 세대의 수난을 온몸으로 보여준 혹은 짝사랑의 부작용으로 망상종결자로 등극한 <하이킥3>의 진희는 잊는 게 좋다. 백진희라는 배우를 이만큼 알게 됐다고 생각한 순간 찾아온 백진희의 낯선 얼굴을 <열여덟, 열아홉>에서 보게 될 테니까.

개봉이 늦어져 그렇지 <열여덟, 열아홉>은 백진희가 <반두비> 다음으로 찍은 영화다. “시나리오 읽고 잔잔한 일본 청춘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너무 좋아서 하고 싶었던 기억이 나요. <반두비>에서 당찬 역할을 했던 터라 그 반대되는 걸 해보고 싶었어요.” <열여덟, 열아홉>의 서야는 이란성쌍둥이 오빠 호야(유연석)를 좋아하는데, 그 마음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앞뒤 재지 않고 자신의 마음만 믿고 돌진하는 캐릭터 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연기해온 인물과 닮았다. 그러나 서야의 ‘사연’보다는 ‘감정’이 크게 부각돼 연기하는 입장에서 꽤 애를 먹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부재로 인해 오빠와의 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려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게 서야 캐릭터예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러닝타임 안에서 서야가 성장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고. 호야를 오빠로 대하는 감정과 남자로 대하는 감정, 그 중간 지점을 제대로 연기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시나리오 읽고 난해했던 점들이 어떻게 표현됐을지.”

“계상과의 사랑이 이루어지면, 진희가 주춤하지 않을까요?”

백진희는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 서야가 자신의 모습과 가장 닮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상대에게 직설적으로 ‘나 너 좋아해’라고 말하는 용기까지 빼닮은 건 아니다. “좋아한다고 먼저 표현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겉으로 맴도는 스타일이에요. 먼저 고백해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거절당할 것 같으면 알아서 정리하고. 그래서 연기할 때 더 시원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못하니까.” 그래도 짝사랑은 씁쓸하다. <하이킥3>에서 진희는 꽁꽁 숨겨둔 마음을 의도치 않게 들켜버린다. “대본을 받아보곤 한참을 울었어요. 짝사랑이라는 게 연기지만 힘들더라고요. 저 혼자 표현하고 저 혼자 줘야 하잖아요. 연기를 하는 동안엔 저도 헷갈려요. 연기할 땐 진짜로 계상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진희의 마음을 받아줬으면 좋겠는데…. 한편으론 사랑이 이루어지면 진희가 주춤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사람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커가는 거니까.” 6개월 이상의 장기 촬영은 <하이킥3>가 처음이라 그런지 백진희는 작품과도, 함께한 사람들과도 ‘정’이 많이 든 듯했다.

종방을 한달여 앞둔 현재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았다. “촬영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나를 많이 잃은 것 같아요. 초반엔 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목소리로, 어떤 눈빛으로 연기했는지 그 호흡을 따라갈 수 있었는데 중반부터 흐트러진 것 같아요. 비음이 너무 심해졌고, 상황에 맞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고, 그런 게 보이는 거예요. 지금 다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 하고 있어요.” <반두비> 때만 해도 연기를 한다는 생각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채 그저 즐겁게만 촬영했다. <열여덟, 열아홉>에선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애를 먹었다.

<하이킥3>를 찍으면서는 재능을 타고난 또래 배우들을 보고 고민이 많아졌다. “제가 5개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배우들은 7개, 8개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걸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어요. 또 다른 작품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저는 <하이킥3>에서 5개 중 3개는 썼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런데 나머지 2개까지 모두 보여줬을 때 과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고민이에요.”

백진희는 아직 <하이킥3> 이후의 계획은 세워두지 않았다. “배우에겐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여백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숙제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제가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혼자 있는 시간엔 주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뜨개질을 한다는 그녀가 목도리를 뜨며(장갑은 무리란다!)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백진희는 언제나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과녁을 명중시켰으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쯤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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