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액터/액트리스
[조성하] 놀 수 있는 판이 있어 행복해
이영진 사진 백종헌 2012-03-15

<화차> 조성하

<화차>의 종근은 요상한 캐릭터다. 전직 형사 종근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촌동생 문호(이선균)를 도와 선영(김민희)의 정체를 밝히는 것인데, 문호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빠져도 될 시점에서도 자꾸 등장한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특별한 설정 없이도, 별다른 대사 없이도, 종근의 심리 변화가 단계별로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진다는 거다. 이건 캐릭터의 힘이기도 하지만, 종근을 뒤집어쓴 배우 조성하의 공이기도 하다. 평범한 듯 보이는 마스크는 한때 조성하에게 약점이었지만, 지금 조성하에겐 무엇이든 그려넣을 수 있는 캔버스 같다. 감정을 내면에서 뿜어올리되, 바깥으로 한꺼번에 분사하지 않고 계산해서 터트릴 줄 아는, 컨트롤 감각을 지닌 조성하가 <황해>의 버스회사 사장 태원 이후 <화차>의 종근으로 돌아왔다.

-눈이 충혈된 것 같다. =(매니저를 보며) 안약 넣자. (웃음) 충혈이 잦은 편이다. 드라마(<한반도>) 촬영 때문에 잠을 못 자서 더 그런 것 같다. 요즘 바쁘긴 한데, 수입과 상관없이 바쁘다. (스튜디오 벽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더니) 아, (오)광록이 형 사진 멋있게 나왔네. (오광록 성대 모사를 하며) “성하야, 내가 시 하나 지어줄까!” 이 사진 보니까 갑자기 드라마 <황진이> 찍을 때가 생각난다. 새벽 5시까지 술 마시다가 동이 트면 형이 시 한수 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 난 “전 가야금을 뜯겠습니다”라고 받고. 그때는 가야금을 아예 차에 싣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가야금 연주를 하나. =이제 다 잊어버렸다. 산조는 다 배웠는데 6개월 단기 속성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 게다가 내 손은 가야금보다는 거문고에 더 어울린다더라. 손가락이 유연해야 가야금을 잘 탈 수 있다는데. 반면, 거문고는 힘으로 퉁퉁 치는 악기이고.

-<황해>(2010)를 끝낸 뒤 정신없었을 것 같다. =드라마는 <성균관 스캔들> <욕망의 불꽃> <로맨스 타운>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여름에 <화차> 찍고, 그 뒤로 뭐했더라. 아, <결정적 한방>과 <온전한 도시>도 있네. <황해> 촬영 직전에는 <파수꾼>도 찍었다. 제작진과 출연진이 중 국에 다녀오는 동안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윤성현 감독이 대본 한번만 봐달라고 했는데 책이 좋았다. 1년을 돌이켜보면 불러주는 데가 많아서 즐거웠다. 이제 조금 놀러다니는 기분이다. 놀 수 있는 판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아나.

-<황해>로 지난해 대종상 남우조연상도 수상했다. =시상식에 갔을 때도 쟁쟁한 후배들에게 박수나 좀 쳐주자는 마음이었다. 처음 초대받았는데, 안 가기도 뭣하고 해서. 그래도 막상 받으니까 의미 부여를 하는 것 같다. 공식적으로 업계에서 넌 배우다, 라고 확실하게 도장을 받은 느낌도 들고. 이제는 좀더 자신감을 갖고서 시작해도 되겠구나 싶고.

-누구보다 가족이 기뻐했을 것 같다. =펄펄 뛰었다. 골인! 골인! (한국 축구팀이) 결승골을 넣은 것처럼 난리가 났다. 아내는 내 수상 소감은 안 듣고 여기저기 전화 돌리고.

-<황해> 끝난 뒤 시나리오도 많이 받았나. =사실 그렇게 많은 대본을 받지는 못했다. 확실히 흥행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황해>는 게다가 호불호가 분명했던 영화이고. 그런 상황에서 <화차>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반가웠다.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책이 굉장히 경쾌했다. 중년 관객뿐만 아니라 젊은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었다. 대학 입학하면 대출받아야 하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안되고 그러잖나.

-원작을 읽었나. =아니. 내가 좀 단순한 편이다. 원작을 보면 그 인물의 이미지가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원작과 시나리오는 별개의 텍스트다. 만약 원작을 읽었다면, 그 작품에선 그랬는데 왜 시나리오에선 이러냐고 우매한 질문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성균관 스캔들>의 정조를 연기할 때도 원작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생각이 묶이면, 몸도 묶이고, 활성 에너지도 안 나온다.

-<화차> 현장 공개 때, 실제로 “부채 때문에 벼랑에 몰린 적이 있다”고 했는데. =결혼한 뒤 3, 4년 지나고나서다. 그때는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둘 다 놀았다. 연극만 하고 살았으니까 현실감도 없고. 껍데기만으로 가장이 되는 것은 아니구나 절실하게 느끼던 때다. 신용불량이라는 낙인을 벗는 일은 쉽지가 않다. 비인간이라고 한번 찍히면 더 나은 등급으로 상승하기가 어렵다. <화차>는 극단적인 설정의 영화이지만 선영(혹은 경선)과 같은 아픔을 체감하는 관객이 많을 거다.

-전직 형사 종근은 문호를 돕는 기능적인 캐릭터에 그칠 수도 있었다. 종근이 선영을 뒤쫓는, 내적 동기는 뭐라고 해석했나. =종근이라는 인물은 하는 것은 없지만, 실은 크게 뭔가를 하고 있는 캐릭터다. (웃음) 원치 않는 상황이지만 결국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종근은 선영이나 경선에게 심리적 동질감을 느낀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전체적인 포석에 따른 변영주 감독의 선택인 것 같다. 종근이 선영 혹은 경선을 끝까지 쫓는 건 조금 더 그녀에게 희망적인 무엇을 제시해주겠다는 연민 때문인데, 이러한 감정은 어디서 나오는가를 곱씹으면서 연기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종근은 중반부에 문호에게 더이상 그녀를 찾는 건 무리라고 만류하잖나. 배우 조성하 입장에서 보면, 종근이 자꾸 문호를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줘야 하는데 인간 조성하의 경우는 그런 상황이 답답한 거지. 우린 딱 자르면 끝이거든. 그에 비하면 종근은 굉장히 마음이 여린 친구다. 그 갭을 줄이는 것이 힘들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불만족스러운 대목은 없었나. =변영주 감독이 첫 대면에서 20년 만난 친구처럼 대하는 바람에 나도 뻘쭘하게 서 있기가 뭣해서 얼떨결에 반가운 척을 했다. (웃음) 동화가 쉽게 돼서 이야기도 편히 나눴다. 용산역에서 선영과 문호가 마주치는 후반부 장면이 좀 건조하다고 했더니 다른 이들의 의견도 그렇다면서 대본을 다시 고쳐서 보내겠다고 하더라.

-그런 자리에선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내 것이 부족하면 그건 언제든지 이야기하면 된다. 하지만 전체가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그 안의 무엇도 최대치를 발휘할 수가 없다.

-처음 등장할 때 종근의 새까만 피부가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동물병원 장면은 첫날 찍었는데 그때는 얼굴이 하얬다. 다음 촬영 때 변영주 감독님이 피부톤을 검게 만들자고 하더라. 처음엔 당연히 성질나지. (웃음) 내 입장에선 피부를 검게 안 해도 연기할 수 있는데. 내 옷 아닌 것을 입은 것 같아 거북스럽기도 하고. 옥에 티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이야기의 흡입력 때문인지 그것을 문제삼는 이들은 많지 않더라. 외려 극에 집중할 수 있는 분장처럼 느끼는 것 같다.

-일부러 튀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부자연스러운 건 많이 피한다. 연기 시작할 때는 거울 보면서 어떻게 바꿔볼까 많이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외적 치장보다 내가 맡은 인물이 지닌 속내나 습성 같은 자료들을 많이 모아서, 그 안에서 공통분모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인물의 정서들을 몸에 넣고 나서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온다고 믿는다. 굳이 금니를 해넣거나 애꾸눈을 하지 않아도 스멀스멀 나쁜 냄새가 나는 느낌을 주고 싶다.

-'꽃중년'으로 분류되거나, ‘따도남’(따뜻한 도시남자)이라고 불려왔다. 외모 중에 남들이 탐낼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나. =외모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루저 배우다. 나 같은 배우들이 일찍 캐스팅이 안되는 게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다. 장동건, 원빈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고 유해진이나 오달수처럼 색깔이 분명한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맡을 역할이 없다. 요즘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조금 생기다 보니 이거 해도 되고, 저거 해도 되고, 안 어울리는 역할이 없다고 해주시지만. (웃음) 신체조건도 마찬가지다. 군대 제대하자마자 뮤지컬을 시작했는데 4년 만에 때려치우고 극단에 들어갔다. 그 첫 번째 이유가 팔다리가 너무 짧다, 두 번째는 얼굴이 못생겼다였다. 그럴 바엔 연기나 제대로 배우자 싶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망언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큰딸이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해 연기를 전공하고 있다고 들었다. 선배로서 딸의 가능성에 점수를 매긴다면. =나도 제로였으니 우리 딸도 제로 아닐까. 아, 그래도 반대하는 사람 없고, 도와주겠다는 사람 있으니 5점을 줄 순 있겠다.

-<황해>로 주목받았던 2010년 이전이었다면 배우가 되겠다는 딸의 선택을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그랬다면 내가 연기 포기하고 딸을 밀어야겠지. 자식 운명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자식을 안 낳았으면 모르지만.

-다음 작품 <500만불의 사나이>에선 어떤 인물로 나오나. =5백만불 들고 튄 부하 직원을 잡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회사 중역으로 나온다. 술상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차기작을 고를 때 감독이나 장르는 안 따진다. 단, 책이 중요하다. 책이 재밌으면 묻어가기도 쉽다. 책이 재미없으면 죽어라고 해도 안된다. 올해도 공력있는 책을 많이 받아보고 싶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