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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백윤식] 순리대로 이루어지게 마련이지

<돈의 맛>의 윤여정, 백윤식

백윤식_ 윤여정씨 하면 임상수 감독이 좋아하는 배우이지요. 윤여정_ 좋아하는 배우가 아니라 늙은 여배우를 나밖에 몰라요. 백윤식_ 아마 임상수 감독이 만든 작품엔 큰 역이고 단역이고 다 참여했을 거야. 윤여정_ <바람난 가족> 이후로는 다 출연했어요. <눈물>하고 <처녀들의 저녁식사> 빼고는.

1947년생의 동갑내기 두 배우는 여태 한 작품에서 함께 연기를 한 적이 없다. 배우로 비슷한 시공간을 살아왔지만 이들의 궤적은 겹치지 않았다. 그런데 딱 한 작품, 백윤식과 윤여정의 궤적이 포개지는 순간이 있다.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 중앙정보부 김 부장으로 영화의 전면에 나선 이는 백윤식이고, 단역으로 또 에필로그의 내레이션으로 이름을 올린 건 윤여정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이 흘러 두 배우는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런데 극중 나미(김효진)의 대사를 빌려 표현하면 이 부부는 “서로를 학대하면서도 또 서로 필요해서 여기까지 온 관계”다. 실상은 껍데기만 부부. 윤여정이 연기하는 백금옥은 백씨 집안의 상속녀로, 돈으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꼭대기에 앉아 집안의 모두를 감시하고 조종하는 권력자. 반면 백금옥의 남편 윤 회장은 돈의 맛에 중독된 채 살아온 자신의 삶이 모욕적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윤 회장은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를 흥얼거린다. <겨울 나그네>는 사랑을 잃고 먼 길을 떠나는 청년이 종국엔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른다는 내용의 가곡이다. 백윤식은 가곡 <겨울 나그네>의 정서와 윤 회장의 삶의 정서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돈의 맛>의 백금옥과 윤 회장은 처음부터 윤여정과 백윤식을 염두에 두고 쓰인 캐릭터 같다. 백윤식은 시나리오 초고가 나온 상태에서 임상수 감독과 만나 출연 스케줄을 조정했고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돈의 맛> 촬영에 돌입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서 주인집 애를 밴 젊은 하녀 명자를 연기하며 파격적으로 영화배우 신고식을 치른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에게 보은하는 마음”으로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임했다. <돈의 맛>에선 그런 감상적인 감정은 다 접고 60대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로 파격적인 면모를 선보인다.

윤여정_ <돈의 맛> 출연을 결정할 때 별 망설임은 없었어요. 내 나이가 되면 많은 기회가 오지 않아요. 나이 들면 감사를 알게 되죠. 이 사람이 나를 필요로 했으니 필요한 부분만큼 최선을 다하리라. 어릴 땐 감사한 걸 잘 몰라요. 내가 잘났으니까 저 사람이 쓰나보다 하죠. 백윤식_ 모든 게 순리인 거예요. 나는 <돈의 맛> 책(시나리오)이 재밌더라고. 윤여정_ 시나리오 읽고 한 장면에 대해서 임상수 감독과 얘기를 나눴어요.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의 몸을 탐하는 거 거부감 들고 불쾌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불쾌하라고 쓴 신이라는 거지. 할 말 없죠. 그의 논리를 이겨먹을 순 없으니까. 백윤식_ 책을 보니까 종래 접근 안 해봤던 상황이 있더라고요. 필리핀 하녀와의 신체접촉 장면이 있는데 작품을 위한 과정인 거죠. 작품에 필요한 장면이고, 내 역할이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 거니 최선을 다했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또 임상수 감독이 쿨 감독이야. 그가 잘 사용하는 말이 ‘쿨하게 갑시다’예요. 윤여정_ 쿨하게 가다 망했죠 뭐.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베드신은 불편해요. 근데 나이 들어서 더 안 좋은 건 어릴 땐 감독한테 응석도 부릴 수 있고 징징거릴 수도 있는데 지금 내 나이에 아들보다도 더 어린 애(김강우) 앞에서 ‘어머 어떡하니, 이런 거 처음인데’ 그런 것도 웃기고. 의연한 척하는 게, 선수인 것마냥 행세하는 게 힘듭디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연륜이 쌓인 배우도 체득하게 되는 게 있다는 말이다. 일상과 연기를 떼어놓는 법, 작품에 맞게 철저히 자신을 캐릭터화하는 법, 언제 욕심을 부려야 하고 언제 욕심을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결국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 이런 게 늙은 배우의 지혜라면 지혜일까. “윤여정 선생님은 신마다 자기 심장이고 영혼이고 다 내놓아요.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하거든요.” 달시 파켓 영화평론가의 배우 출연기(<씨네21> 850호)에 나오는, 임상수 감독의 얘기가 많은 것을 압축하고 있다. 윤여정은 인터뷰 중 ‘전문 배우’라는 말을 썼다. 전문 배우는 남의 삶을 흉내내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되어 그 순간을 살다 나온다고 했다. 백윤식도 마찬가지였다. 배우는 배우고 캐릭터는 캐릭터라고.

윤여정_ 난 배우가 논리를 논하는 게 싫어요. 배우는 느낌으로, 감성으로 하는 거예요. 제일 싫은 게 현장에서 새벽 3시에 감독이랑 논쟁하는 애들. 왼쪽으로 넘어지는 게 감정상 안 좋다, 오른쪽으로 넘어지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러는데 아우 돌아버려요. 오른쪽으로 넘어지나 왼쪽으로 넘어지나 거기에 무슨 감정이 있겠어요. 그런 애들 진짜 때려주고 싶어.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감독이랑 합의를 봤어야지. 난 감독의 디렉션을 받겠다고 나온 배우인 거예요. 백윤식_ 감독을 신뢰하지 않으면 작품 못하죠. 어쩌다 만에 하나 연기를 하는 데 불편한 게 느껴져요. 그럴 땐 소통을 하려고 합니다. 윤여정_ 아, 백윤식씨는 좀 하더라. 반론을 제기해서 소통을 하려고 하시더라. 근데 이게 낫다 저게 낫다는 없어요. 다 개인차니까. 난 집에 빨리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대로 막 빨리빨리…. (웃음) 백윤식_ 궁극적으로 나도 작품에 대한 욕심이 있고 감독도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서로의 욕심이 덜 채워질 때 그런 경우가 발생하는 거 아니겠어요. 어디까지나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소통을 잘해서 정점을 찾자는 거니까.

두편의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더킹 투하츠>와 <돈의 맛> 홍보를 병행하고 있는 윤여정은 손대면 톡하고 쓰러질 듯 보였다. 힘들게 강행군을 하고 있는 윤여정은 깨어 있기 위해 인터뷰 내내 에스프레소와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된 백윤식은 현재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촬영 중이다. 순리대로 무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이와 임상수라는 공통의 항을 제외하면 정말 닮은 게 없어 보이는 두 배우. 하지만 배우로서 무뎌지지 않기 위해 각자의 스타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은 참 닮아 있었다.

백윤식_ 일을 그렇게 욕심내서 하고 싶진 않아요. 윤여정_ 우리는요, 이미 세상을 다 살아서 알아요. 내가 열망한다고 해서 역할이 오지 않아요. 오게 되면 하고 안 오면 안 하고. 백 선생님 말은 그런 뜻일 거예요. 그게 순리대로 산다는 거예요. 백윤식_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더 달궈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좀 다른 맛을 보여주고 싶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윤여정_ 연기가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면 저절로 잘할 수 있는 거면 참 좋겠어요. 그런데 어떨 땐 신인이 더 잘하죠. 신인이 새로운 감성으로, 새로운 느낌으로. 그러면서도 자위를 하는 건 걔네들이 못하는 걸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거죠. 젊음과 늙음이 왜 차이가 있겠어요. 젊은 사람들이 늙은 사람의 지혜를 가질 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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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식_ 스타일리스트 송아영 실장·헤어&메이크업 정운 원장(정운뷰티공감)·의상협찬 로드앤테일러, VIA by 이정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윤여정_ 스타일리스트 한상희 실장·헤어 강성아·메이크업 이수민·의상협찬 미쓰지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