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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AT] 내 손으로 준비한 최초의 만찬

오전부터 장을 봐야 한다. 동시대 예술가 중 가장 좋아하는 커플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될 수 있는 대로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할인마트를 피하자 마음먹은 터라(난 대기업을 해체해야 이 지구가 살고 사람들의 삶이 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질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동네 마트에 간다. 그래도 다 있다. 간혹 없는 게 있다 해도 ‘꿩 대신 닭’식으로 선택하면 전혀 아쉬울 게 없다. 심지어 더 싸고 싱싱한 품목도 있다. 게다가 카운터에는 내 얼굴만 보고도 고객번호와 이름을 알아맞히는 아가씨가 앉아 있고, 고기 코너에는 잡채용 고기를 싸주며 “누구 생일인가보죠?” 하고 방긋 웃는 청년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생선 코너에선 금실 좋아 보이는 부부가 1만원짜리 광어회를 알뜰하게 떠주고 초장까지 챙겨준다. 그 광어회 1마리에 오징어 1마리, 보쌈용 삼겹살 1근, 가지 3개, 대형 정종 1병을 사니 4만5천원이 나온다. 자, 기대하시라. 이제부터 이걸로 한·중·일을 넘나드는 20만원짜리 식탁을 차려볼 셈이다.

먼저 ‘일본식 광어회 무 샐러드’에 들어갈 와후 드레싱을 만든다. 당근, 양파, 마늘, 생강을 믹서에 간 뒤에 맛술, 진간장, 물, 식초를 넣고 끓인 것과 섞어주기만 하면 된다. 초고추장에 상추와 마늘을 곁들인 광어회가 뭐가 어때서 그런 ‘일본식 야단법석’을 떠냐고 물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다. 물론 나도 할 말이 있다. 나의 손님들은 주로 속초에서 지낸다. 회라면 아주 질리도록 먹었을 텐데 서울에서 먹는(그것도 동네 슈퍼에서 사온) 광어회가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좀더 감칠맛이 나도록 최소한 4~5시간 이상, 보통은 하루 정도 숙성시켜 먹는다. 게다가 독특한 소스에 숙성시키면 더 인상적인 맛이 난다. 물론 식감도 훨씬 부드러워지고. 여하튼 그 광어회 샐러드는 일종의 에피타이저이고 이제는 본식을 준비할 차례. 삼겹살 반근은 한국식 보쌈으로 나머지 반근은 중국식 동파육으로 하려고 한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약한 불에 오래 삶을수록 고기가 부드러워진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고기가 부드러워지는 그 2시간 동안 또 다른 메뉴를 준비할 수 있다. 사이드 메뉴로 기름 없이 튀기는 오징어튀김을 만들고 가지 토마토소스 치즈 구이까지 만든 다음 재빨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동파육 소스를 만들고 보쌈에 곁들일 깻잎절임과 묵은 김치를 물에 씻어 준비한다. 그럼 끝이다. 손님이 오길 차분히 기다리면 되는 거다.

회사에 다닐 땐 엄두도 못 낸 일이다. 그땐 하루에 두끼 모두를 외식으로 때웠다. 심지어 주로 집에서 일하는 남친에게도 식당 음식을 사다줬다. 의심스러운 식재료와 자극적인 인공조미료, 불결할지도 모르는 조리 과정에 대한 불신과 불안 속에서도 그 많은 음식을 몇 십년 동안 꾸역꾸역 잘도 먹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심지어 너무 많이 먹어서 집에 가서 토할 정도였다. 그걸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회사를 그만두고 수입이 4분의 1로 줄었지만 이제 내겐 넘치는 시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 손으로 만든 믿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일 수 있는 시간, 진지하게 교제하고 소통하고 싶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먹고 마시며 돈벌이와 무관한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시간. “참, 권부문 선생님 그날 주신 요라 귈러와 요한 메테손 CD 잘 듣고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귀한 음악이라니….”

일러스트레이션 황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