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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의 오! 컬트 <일곱가지 소원>
2002-01-23

비나이다, 비나이다

유치원 때 왠지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배우는 <브로드캐스트 뉴스>의 윌리엄 허트였다. 초딩 고학년 때 왠지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배우는 <모리스>와 <비터문> 이후의 휴 그랜트였다. 그러다 95년 꽥, 기억하는가? LA 길바닥 한가운데에서 휴 그랜트의 카섹스 스캔들 대폭발. 비슷한 시기 델타공항에 총을 갖고 들어갔다가 구류 살았던 크리스천 슬레이터는 왠지 멋있어 보였던 주제에 누구랑 자든 자기 알아 할 일인데도 마치 내 일처럼 못마땅했던 이유는 그의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에스티 로더 모델 엘리자베스 헐리가 당시 나의 여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나의 마돈나를 배반하고 별로 안 예쁜 콜걸(지금은 디바인 브라운이 오히려 별로 안 예뻐서 그랬던 게 아닐까… 라고도 생각. 그땐 남자를 몰랐어, 지금도 모르지만)과 길바닥에서 남세스럽게… 하는 착잡한 심경으로 짧은 영어나마 <엔터테인먼트 투나잇>을 시청하며 “여전히 휴를 사랑하고 그없이 살 수 없지만 남편으로는 신뢰를 못하겠다”고 울먹이는 엘리자베스 언니의 목소리에 순진하게도 더불어 통탄하였던 것. 그러면서 자신 역시 끝장나게 바람을 피우면서도 밤낮 허리까지 뜯어진 치마 입고 동거생활 지속하면서 ‘휴와 나는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 어쩌고 하는 그녀의 모습을 마치 내내 시앗보는 형부를 둔 팔자 센 친정 큰언니 보는 심경으로 이날 이때까지 바라봐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게 웬일, 제야의 종이 친 뒤(물론 머리끝까지 술이 찰랑찰랑 찬 채) 신촌 한복판에서 웃옷과 길과 같이 술마신 사람을 잃고 독감에 걸려버린 그날 밤, 제발 새해는 좋은 해가 되기를 빌며 침대에서 푹 쓰러진 새벽 브렌든 프레이저가 되어 있는 내 앞에(하마터면 원시 틴에이저인 줄 알았다) 매끈한 곡선을 그대로 투과하는 가죽 슈트를 입은 엘리자베스 언니가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일곱 가지 소원을 들어 줄 테니 영혼을 팔아라’라는 한글자막이 그녀의 클로즈업 아래 떠올랐다. 그리하여 짱정신병자다운 소원을 여섯개까지 늘어놓은 뒤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마지막 소원을 털어놓았다. 평생 철 안 들게 해줘, 언니. 발톱 감추는 법을 터득하지 않게 해줘. 처세술이란 거 갖고 대범한 척 사람 마구 상처내는 어른이 되지 않게 해줘. 괜찮은 어른 되기 너무 힘들잖아. 차라리 평생 패배자로 남고 싶어.

그녀는 짙푸른 안광으로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영혼 한복판을 꿰뚫어보듯이.

그렇다. 심각한 건 집어치워버리자, 사실 마지막 일곱 번째, 언제나 이 몸의 평생 소원은 머리에 빨간색 고무장갑을 쓰고 월레스와 그로밋이 창문 닦으러 출동하는 사이드카를 타고서 퇴계로를 무한질주하는 것이다. 아니면 테레빈유를 태운 연기를 마시며 영영 잠들어버리든지. Or else forget about it.

엘리자베스 언니는 어떻게, 소원을 죄다 들어주었느냐고? 일곱 가지 소원을 주절거리면서 말할 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내내 듣더니 “응, 잘 들었다. 그럼 이만”이라며 사라져버렸다. 물론 내 영혼을 가지고. 이런. 김현진/ 21 the suicide Bl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