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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2-06-22

‘인위적’ 과장과 ‘자연적’ 일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배흘림기둥’이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 혜곡 선생의 이 구절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왜 우리 조상들은 기둥에 배흘림(entasis)을 주었을까? 유홍준씨는 곰브리치의 말을 인용한다. “(엔타시스 형식을 취한) 기둥들은 탄력성있게 보이며, 기둥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온라인 백과사전에서는 배흘림을 착시 현상과 관련해 설명한다. “기둥을 직선으로 만들면 착시 현상에 의해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 보여 건물이 불안정하게 보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착시 현상으로 들어가는 만큼을 나오게 하여 전체적으로 건축물의 안정감을 갖게 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향토문화대전’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배흘림이 착시의 교정을 위한 장치라는 주장이 정설로 통하는 모양이다.

건축가 서현 교수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배흘림이 착시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량수전의 기둥은 직선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량수전의 기둥은 너무나 뚜렷하게 항아리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배흘림을 착시와 연관시키는 설명은 서양의 이론을 무분별하게 우리 건축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현 교수에 따르면, 배흘림은 건물의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는 공학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대체 누구 말이 옳을까?

세 가지 가설

미학적 효과, 광학적 교정, 혹은 공학적 기능. 이중에서 가장 오래된 가설은 두 번째로, 저 멀리 알렉산드리아의 헤론(AD 10~70)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통형 기둥은 바라볼 때 가운데가 좁아 보이므로, 그(건축가)는 기둥의 그 부분을 더 두껍게 만든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의 건축가들은 건물이 휘어져 보이는 것을 피하려고 다양한 종류의 환영효과를 사용했다. 배흘림도 그런 ‘광학적 교정’의 기법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배흘림이 직선의 딱딱함을 피해 기둥에 생기를 주는 ‘미학적 효과’를 위한 기법이라는 가설은 19세기 말에 처음 등장했다. 건축가 펜로즈(1817~1903)에 따르면 배흘림은 “동물의 사지에 늘 곡선의 윤곽을 부여하는 자연의 습관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건축가 조지 트레벨리언 경은 도리스 기둥의 배흘림이 (팔뚝의 알통처럼) 긴장된 근육의 부풀어 오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주장한다. 위에서 유홍준이 인용한 곰브리치의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배흘림이 ‘공학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마지막 가설은 멀리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활동했던 수학자 라그랑주(1736~1813)에 따르면, 배흘림은 기둥을 구조적으로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 배흘림기둥이 여러 기둥 형식 중에서 하중을 지탱하는 데에 공학적으로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약 4/3 : 1의 비율로 배흘림기둥이 원통형기둥보다 더 튼튼하다고 한다.

다시 무량수전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을 지은 장인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기둥에 배흘림을 주었을까? 그리스의 장인들이 이 물음에 침묵한 것처럼, 고려와 조선의 장인들도 우리에게 아무런 힌트를 남겨놓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현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배흘림기둥은 직선이 휘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량수전 기둥의 곡률은 안으로 굽어보이는 착시를 상쇄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항아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도리스식 건축 중에서 가장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 배흘림의 정도는 원주의 1/600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육안으로는 기둥이 부풀어 있음을 확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서양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배흘림은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에서나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의 눈의 해부학적 구조(구형)에서 비롯되는 착시를 교정하는 장치라기보다는 형식적 요소를 터무니없이 과장하는 일종의 ‘바로크-현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미학적 가설과 공학적 가설뿐. 사실 ‘배흘림’(entasis)이라는 말은 ‘팽팽하게 긴장시키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엔테이테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를 우리는 비유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글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이해할 경우 엔타시스는 기하학적 기둥에 인간의 근육과 같은 생(生)의 표현을 주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축어적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기둥을 지탱하는 물리적 기술을 의미할 것이다.

아름다워 보이는가?

적어도 서양 건축에서 과장된 배흘림은 미학적으로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약간의 엔트로피, 즉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일탈은 딱딱한 기둥에 생기를 주나, 과도한 엔트로피, 즉 확연히 눈에 띄는 요란한 일탈은 외려 뭔가 과도하다는 인상만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미학적 효과’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현상.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배흘림기둥의 객관적 효과, 즉 그것이 다른 기둥보다 공학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다.

배흘림이 착시를 교정하는 기법이라는 광학적 가설을 반박하는 가장 유력한 근거가 바로 이 과장된 배흘림이다. 한국의 배흘림기둥의 곡률은 대체로 이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의 배흘림 양식에 가깝다. 그런데 방금 살펴본 것처럼 과장된 배흘림은 미학적으로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서현 교수가 배흘림에 관한 광학적 가설을 배제한 뒤, 미학적 가설을 뛰어넘어 곧바로 공학적 가설로 넘어간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검색을 하다 우연히 서현 교수의 가설을 반박하는 예를 발견했다. 가령 안동에 있는 봉황사 대웅전은 건물 앞뒷면의 기둥의 모습이 다르다고 한다. 즉 건물 뒷면의 기둥은 민흘림인 반면, “앞면에 늘어선 기둥은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해 강한 배흘림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배흘림기둥의 목적이 구조공학적인 데 있다면 뒷면도 배흘림을 처리해야 했을 것이다. 앞면에만 배흘림을 준 것은 분명히 보는 이들의 눈을 위한 미학적 장치다.

이는 한국의 배흘림기둥이 무엇보다 ‘미학적’ 현상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한국의 것처럼) 과장된 배흘림은 미적으로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답은 한국과 서구의 미의식이 급진적으로 다르다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구의 건축은 기하학적이나 한국의 건축은 자연적이다. 자연목의 껍질만 벗겨 그 형태 그대로 기둥으로 쓰는 게 우리의 미의식이 아니던가. 이런 미감에는 서구에서 ‘인위적’ 과장으로 여겨지는 것이 외려 ‘자연적’ 일탈로 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