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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라이언의 딸>의 프레디 영
2002-01-23

웅장함의 미학

이렇다 할 스타에 여자배우는 말할 것 없고, 그 흔한 러브스토리 하나 없는 영화. 1962년 발표된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200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온통 관객의 시선을 잡아놓는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 드문 예이다. 70mm 대형스크린 위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은 때로는 이글거리는 낮의 열기를 담아내는가 하면, 이내 차디찬 밤공기를 펼쳐놓기도 하고, 모래와 바람과 태양은 각자의 몫을 부여받은 채 백인영웅 로렌스의 삶과 어우러져 화면을 다채롭게 채워놓는다.

가히 작품을 이끌어나갈 주인공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을 이 사막의 촬영은 바로 영화의 성공과 직결되는 관건이었으며, 이를 화면에 담아내려는 이들과 특유의 고집으로 일관하는 사막의 악천후는 끝없는 투쟁을 벌였다. 수레에 장비를 실어나르는 육체적 노동이 행해져야 했다면, 열에 민감한 카메라를 위해 뜨거운 태양열을 식혀줄 냉각장치를 급조해야 했다. 1910년 즈음 촬영과 인연을 맺은 뒤 이미 그 당시 60여편의 영화를 작업한 촬영감독 프레디 영의 연륜은 이를 뒷받침할 버팀목으로 작용하여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장관을 연출해낸다.

지난 1998년 96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한 프레디 영. 손으로 카메라를 돌려 찍는 시절부터 줄곧 카메라 뒤의 자리를 지켜왔던 그의 족적을 따라감은 곧 영화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축구와 복싱에 재능을 보이던 영국 태생의 소년은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급선무였고, 영화와의 그리 극적이지 않은 만남이 시작된 것도 이때이다. 음식을 나르고 잔심부름을 하던 곳이 우연히 영화사였고, 암실바닥의 청소에서부터 필름을 커팅하던 잔일거리를 거치는 동안 카메라는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1918년 영국의 첫 공상과학영화인 <달 속의 사람>의 현상을 시작으로, 촬영과 조명에 관한 일거리를 맡아 꾸준히 공부를 해오던 중, <더 플래그 루테넌트>(The Flag Lieutenant, 1926)의 보조 카메라맨으로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빅토리>로 촬영감독으로의 데뷔전을 치른다. 이후 허버트 윌콕스와 작업하며 주류촬영감독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그는 <화이트 카고>(1929), <카나리아는 때로 노래한다>(1930), <런던 멜로디>(1937), <굿바이 미스터 칩스>(1939)에 이르기까지 기술적 완성도를 갖춘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2차대전 중에는 군 홍보용 영화를 찍으며 흑백영화의 달인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아이반호>(1952) 촬영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한다.

규모의 미학이라 불리는 스케일이 큰 웅장한 그만의 스타일을 형성한 것은 데이비드 린과의 만남 이후이다. 영을 일컬어 “황소의 정력과 영화에 대한 지식으로 똘똘 뭉친 자”라는 린의 평가와 자신을 100% 지지해주며 믿어주었던 린에 대한 영의 믿음은 영화사의 커다란 걸작들을 순산해내는 원동력이었다. 절대적으로 원래의 크기로 감상해야 할 영화, 바로 65mm 카메라로 찍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장관은 70mm 화폭에 펼쳐질 때야 그 빛을 발한다. 특히 사막 저 끝에서 하나의 점으로 서서히 등장하던 족장 알리(오마 샤리프)의 등장은 450mm의 장 초점렌즈에 담긴 채 지금도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각인된다.

영의 이같은 촬영은 역시 린과 함께 작업한 <닥터 지바고>(1965)에서도 돋보이는데 광활한 러시아의 설원 위에서 펼쳐진 지바고의 사투는 보는 이를 이내 압도하는 위력을 발휘하며, <라이언의 딸>(1970)로 이어져 오스카를 세번씩 수상하는 성과를 거둔다. 훨씬 더 많은 장비와 돈을 필요로 하며 상영을 하는 데도 제약이 따르는 이같은 70mm 영화에 대해 그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꼭 70mm 영상이 필요한 경우에만 촬영을 할 것을 후배들에게 당부했지만, 이제 린이나 영처럼 무모한 촬영을 감행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

그간 영은 <침묵의 살인>(1967)을 통해 촬영 전 필름에 빛을 주어 색다른 질감을 표현해내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였으며, 화려한 경력에도 신인감독과 함께 작업하는 초심을 잃지 않아 왔다. 촬영과 함께 평생을 해온 영은 매순간 새로운 시도를 그치지 않았기에 오늘 ‘예술가로, 또 한 사람의 장인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신사’로 기억된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Freddie Young 필모그래피

촬영

<결혼식으로의 초대>(Invitation to the Wedding, 1985) 조셉 브룩스 감독

<용사의 검>(Sword of the Valiant, 1982) 스티븐 윅스 감독

<리처드스 싱>(Richard’s Things, 1981) 앤서니 하비 감독

<라프 컷>(Rough Cut, 1980) 돈 시겔 감독

<혈선>(Bloodline, 1979) 테렌스 영 감독

<아이크>(Ike, 1979) 보리스 사갈 감독 외

<스티비>(Stevie, 1978) 로버트 앤더스 감독

<파랑새>(The Blue Bird, 1976) 조지 쿠커 감독

<허가받은 살인>(Permission to Kill, 1975) 시릴 프랑켈 감독

<타마린드 시드>(The Tamarind Seed, 1974)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

<더 애스픽스>(The Asphyx, 1973) 피터 뉴브룩 감독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Nicholas and Alexandra, 1971)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

<라이안의 딸>(Ryan’s Daughter, 1970) 데이비드 린 감독

<공군 대전략>(Battle of Britain, 1969) 가이 해밀턴 감독

(You Only Live Twice, 1967) 루이스 길버트 감독

<침묵의 살인>(The Deadly Affair, 1967) 시드니 루멧 감독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65) 데이비드 린

감독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1962) 데이비드 린 감독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Solomon and Sheba, 1959) 킹 비도 감독

<가이디언의 날>(Gideon's Day, 1958) 존 포드 감독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 1956) 빈센트 미넬리 감독

<모감보>(Mogambo, 1953) 존 포드 감독

<원탁의 기사>(Knights Of The Round Table, 1953) 리처드 토프 감독

<지젤>(Giselle, 1952) 헨리 콜드웰 감독

<아이반호>(Ivanhoe, 1952) 리처드 토프 감독

<보물섬>(Robert Louis Stevenson’s Treasure Island, 1950) 바이론 하스킨 감독

<나의 아들 에드워드>(Edward, My Son, 1949) 조지 쿠커 감독

<시저와 클레오파트라>(Caesar And Cleopatra, 1946) 가브리엘 파스칼 감독

<침입자들>(Forty-Ninth Parallel, 1941) 마이클 포웰 감독

<콘트라밴드>(Contraband, 1940) 마이클 포웰 감독

<굿바이 미스터 칩스>(Goodbye, Mr. Chips, 1939) 샘 우드 감독

<넬 그윈>(Nell Gwyn, 1934) 허버트 윌콕스 감독

<카나리아는 때로 노래한다>(Canaries Sometimes Sing, 1930) 톰 월스 감독

<빅토리>(Victory, 1928) M.A. 웨더렐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