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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바이어들은 열정을 산다
안현진(LA 통신원) 2012-07-13

<브레이킹 배드>의 빈스 길리건

<브레이킹 배드> 팀 한자리에, 아론 폴, 빈스 길리건, 브라이언 크랜스턴(왼쪽부터)

<브레이킹 배드>는 장수 TV시리즈가 되기 위한 황금률들을 거스르고도 성공한 희귀한 경우다. 제1황금률: 시청자로 하여금 주인공을 사랑하게 하라. 매주 같은 시간대에 시청자를 TV 앞으로 불러오려면 그건 당연하다. 한데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턴)는 좋아하기 힘든 인물이다. 소심하지만 착한 남자였던 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합리화하는 악당으로 변모하는 걸 보고 있으면, 좋아하기보다 싫어하기가 쉽다. <브레이킹 배드>가 어긴 두 번째 황금률은 레퍼토리 구조를 포기하고 마지막 방영일자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ER> <로 앤 오더> 등의 TV시리즈가 20년 동안 시즌을 거듭하며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레퍼토리 드라마가 가지는 반복 구조를 고수하고 캐릭터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다르다. 주인공은 극적으로 변화했고, 해피엔딩은 애초에 배제되었으며, 시즌이 지날수록 드라마 속 소우주는 주인공에게 안겨줄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가속도를 붙여 달려간다.

크리에이터인 빈스 길리건이 직접 지은 제목 ‘Breaking Bad’는 ‘탈선’ 혹은 ‘타락’을 의미한다.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를 비롯해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인데, 드라마가 성공한 지금은 미국 전역에서 그 의미가 통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여러 인터뷰에서 길리건이 말한 <브레이킹 배드>의 시작은 이랬다. 아픈 아이가 사는 낡은 아파트에서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다가 적발된 남자에 대한 뉴스를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하다, 이동성 있는 RV에서 제조하면 어떨까 농담을 했다. 하지만 이 농담 속 한 장면은 평소 “천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옥이 없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라는 인과론자였던 길리건으로 하여금 속죄로 끝을 맺어야만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얻은 힌트에 평소의 철학이 더해졌고, 주인공이 암 진단을 받고,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설정하는 등의 세부사항은 그 뒤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와 영감으로 채워졌다.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X파일>의 작가로 7년 동안 일한 경력 덕분에 네트워크를 상대로 피칭할 기회는 종종 찾아왔으나, 실제로 방영하겠다고 나서는 채널은 없었다. 무단횡단도 안 하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을 모범적인 화학교사가 마약제조를 하는 범죄자로 타락하는 이야기가 공중파 방영에 부적절하다는 걸 알기에, 그가 두드릴 수 있는 문은 <HBO> <TNT> <FX> 등으로 한정됐다. 반응은 좋았지만, 거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회는 거듭된 고배에 지칠 무렵 <AMC>로부터 찾아왔다. 지금이야 <매드맨> <킬링> 등을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로 성장했지만 당시 <AMC>는 주로 고전영화를 재방영했고 오리지널 드라마를 만든 적이 없었다. 길리건은 자신의 동의 없이 각본을 보낸 에이전시에게 “왜? <푸드네트워크>에 보내지 않고? 메스암페타민을 굽는 이야기잖아?”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AMC>와의 첫 만남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브레이킹 배드>는 날개를 달았고, 2012년 7월 시즌5의 방영을 기다리고 있다.

빈스 길리건은 <X파일> 이전에도 히트작은 없었지만 영화계에서는 비교적 고속 성장한 어린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영화작가의 꿈을 접고 <X파일> 작가실로 들어간 1995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경력이 제대로 시작된 걸 느꼈다고 한다. 아메리칸 텔레비전 아카이브는 인터뷰 가장 마지막에, 후학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을 물었다. 그는 대답한다. “이야기를 팔려고 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네트워크) 바이어들이 사려는 것은 열정이다. 열정은 꾸며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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