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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웠던 80년대, 액션으로 풀어볼까 - 김광수
2001-03-12

청년필름 대표·<쿨>

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로 입문, 어떤 작품에 참여했나.

코믹 연기를 곧잘 한다는 주위의 격려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들어가선 곧바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느라 정작 무대하곤 거리가 멀었다. (웃음) 전대협에서 일하던 마지막 해 92년. 사회단체에 들어갈까 하던 차에 정지우 감독을 만났다. 같은 과 3년 후배였는데,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스무살 젊은이에게>라는 대학생 의식화(?) 비디오물을 제작하고 있던 영화제작소 청년은 거대 조직에 몸담았던 내가 배급책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큰 도움은 못줬다. (웃음) 96년이었나. 장편영화를 하자는 이야기가 내부에서 나오면서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 이외의 스탭들에겐 특히 그랬다. 당시 이선미 프로듀서는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제작부로, 나는 동숭아트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기획, 배급쪽 실무를 맡으면서 관객의 반응을 직접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어 좋은 때였다. 이후 영화홍보사 알앤아이에서 <킹덤> <맨 인 블랙> 등을 홍보했다. 청년필름으로 귀환한 뒤 곤궁한 청년필름을 먹여살리기 위해 ‘바른생활’이라는 영화홍보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98년 초 첫 작품 결정을 위한 테이블이 마련됐다.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와 김용균 감독의 <쿨>이 올랐다. 세 페이지에 걸쳐 스토리를 상세히 구성해 온 김용균 감독과 달리 정지우 감독은 달랑 반 페이지에 줄거리도 애매한 이야기를 적어왔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설정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반쪽짜리 <해피엔드>가 낙점됐다. 이후 캐스팅이 난항을 겪으면서 결국 명필름이 제작을 맡고 청년필름이 기획을 맡았지만, <해피엔드>는 청년필름의 창립작품이나 다름없다.

프로듀서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언젠가 이런 영화를 만들어봐야지 떠올린 영화가 있다면.

80년대를 회고하는 영화를 언젠가 하고 싶다. 패배주의적인 영화말고. 매번 우리가 진 건 아니었지 않나. 그때 상황을 비틀어 액션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한다. 물론 그런 이야기하면 주위 사람들은 다들 웃는다. 언젠가 <비천무>의 김영준 감독에게 연출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와이어 액션이 없어 싫다고 하더라. (웃음) 89년 임수경씨 방북과 관련해서 한양대가 봉쇄된 일이 있었는데, 삭발한 나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전경들이 까맣게 둘러싼 학교를 바라보면서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만들어지면 요즘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지만 모교에서 찍을 테니 학교쪽에서는 좋아할 것 같다. (웃음)

왜 프로듀서를 하는가? 어떤 재미? 어떤 의미.

난 씨앗을 만들어낼 자신은 없다. 그건 감독이 하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진 않다. 프로듀서는 씨앗을 만들진 못하지만 어떤 모양의 꽃을 피우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면서 또다른 창작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조합하고 세팅하는 즐거움 말이다. 덧붙여 청년필름의 이름 걸고 만드는 영화는 예술영화가 아니다. 개성과 완성도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작가영화의 범주에 넣을 수는 있겠지만.

가장 어려웠던 시기, 사건? 어떻게 헤쳐나갔나.

<해피엔드>의 최보라 역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다. 첫장부터 체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데다 신생영화사인데 어느 여배우가 거들떠나 봤을까. 전도연, 최민식씨에게도 시나리오를 건넸지만 거절당했다. 여러 제작사들이나 투자사들로부터 관심을 끈 건 한석규씨가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좋은 시나리오라고 소개한 다음부터다. 저예산영화로 만들면 투자하겠다는 제안도 있었지만, 합작하자는 명필름을 택했다. 감독 생각을 많이 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한정된 조건에서 찍게끔 하고 싶진 않았다. 감독의 뜻대로, 시나리오대로 찍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제작사라야 했다. 전도연씨가 출연을 결정한 데는 명필름에 대한 신뢰도 있었을 거다. 그때 명필름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 청년필름에 많은 걸 내줬다. 운도 좋았고, 그때 선택의 결과가 만족스러워 다행이다.

그간 경험에서 ‘이것만은 고치겠다’고 생각한 충무로 관행이 있다면.

청년필름도 어쩔 수 없이 관행을 되풀이한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두팀이 있는데, 월급을 못 준다. 나도 못 받으니까 양심에 거리끼진 않지만. (웃음) 제작사와 시나리오 작가의 종속적인 계약서도 문제다. 차츰 개선해야 할 사항이지만, 주도권에 대한 유혹이 없는 것도 아닌 나로서는 괴롭다. (웃음)

나의 스승, 나의 교범은.

정지우 감독은 <해피엔드>를 ‘치정극’이라고 했다. 근데 나는 너무 구닥다리 같으니까 ‘핏빛 멜로’로 하자면서 뜯어말렸다. 모던하고 뽀시시해 보여야 하니까. 그런데 오히려 심재명 대표가 감독 편을 들더라. 영화라는 결과물로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가 문제지 애초부터 관객에게 맞춰가는 건 안 된다고 했다. 한발 앞서가는 분들이었다. 뚝심의 이은 감독이나 마당발 심보경 이사까지. 사전단계가 마무리될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그곳에서 봤다. 명필름의 시너지를 항상 염두에 둔다.

3세대 프로듀서들이 해야 할 일 담당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신철, 차승재 등 앞선 선배들의 공은 분명 있다. 하나만 들면, 한국영화시장을 키웠다는 것이다. 우린 좀더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 기대에 걸맞은 풍부한 장르영화들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준비중인 작품.

<쿨>은 멜로영화다. 20대가 타깃이다. 만화적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다. 소재만 그런 게 아니다. 처음과 끝에 애니메이션을 넣어 비주얼 역시 그런 느낌을 강조한다. 제목처럼 감정의 과잉없이 ‘덤덤한’ 만화를 보는 느낌을 줄 생각이다. 치고 박지 않고 질질 짜지 않고 숨기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그런 관계를 담으려 한다. 판타지도 강하다. 전화하다가 옆에 상대방의 존재가 느껴지는 느낌 같은 것 있잖은가. 엉뚱한 판타지말고 현실 안에 접붙인 판타지라고 하면 될까. 시나리오를 다듬으면서 신파를 들어냈고, 기시감이라는 모티브에서 시작한 설정들도 제거했다. 찍고 나서 덜어내느니, 미리 잘라낼 건 떼내고 ‘쿨’하게 시작할 참이다.

이영진 ant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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