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세기초 만화의 어떤 경향2
2002-01-24

전통에 기초한 뉴웨이브

지난 세기의 말과 이번 세기의 초반, 우리는 일찍이 한국의 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한 경향이 급속도로 성장해온 모습을 보아왔다. 이 흐름은 90년대 중반, 위로는 박광수의 <광수생각>, 아래로는 이우일의 언더그라운드 만화로부터 촉발되어, 불과 몇년 사이에 다양한 성향의 만화가들을 합류시켰다. 외면적으로는 홍승우의 <비빔툰>, 정연식의 <또디>, 양영순의 <아색기가> 등 신문만화계의 양상들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이우일, 현태준 등 밑바닥에서 이 흐름을 이끌었던 만화가들의 게릴라적 활동이나 ‘스노우캣’과 ‘카툰P’ 등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신진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좀더 강력한 폭발성을 느끼게 된다.

상당히 다양한 내용과 취향을 선보이고 있는 이들 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 때문이다. 먼저 일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한국 주류만화의 그림체와는 확연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선 중심의 묘사가 아니라 분명한 폐곡선을 맺은 면 중심의 그림을 그린다. 당연히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은 깔끔하고, 폐곡선 속에 색을 부어넣은 컬러만화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디자인적인 완결성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데, 이들 만화가들의 다수가 디자인 전공자라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새로운 경향을 강주배의 <용하다 용해>, 김진태의 <시민 쾌걸>, 윤태호의 <로망스> 등 얼핏 비슷해 보이는 신문만화들과 구별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형식적 특징 때문이다. 이 세 만화가들은 분명히 주류만화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무가지나 언더그라운드 공간에서 시작되어 신문만화에서 대중화되고, 인터넷에서 만개했다는 태생적인 특징은 전통의 만화잡지 작품군과는 분명한 차별을 보이도록 만들었다. 짧게는 불과 몇컷, 길게는 1, 2페이지 분량의 짧은 에피소드 전개 스타일이 대부분이고, 긴 스토리를 이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재면에서도 스포츠, 미스터리, 로맨스 등 장르만화와는 인연이 없고, 일상 생활상의 소재와 대중문화의 패러디를 적절히 활용한 유머만화가 대부분이다. 나는 이들이 한편으로는 70년대 명랑만화와 박수동식의 성인만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너츠> <심슨> 등 미국식 신문만화와 TV카툰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광수생각>, 새로운 신문만화의 출현

한국의 주류만화계가 끔찍한 불황을 겪어온 지난 몇년간, 일간지와 스포츠 신문의 만화유치 경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어쩌면 지난 세기의 초반, 미국에서 현대만화가 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부여한 거대 신문의 만화 경쟁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만화가 새로운 시장에서 훌륭히 성장해가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이율배반적인 영역인 일간지와 스포츠 신문에서 이들이 맹활약을 펼치고 대중화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모순적인 결과를 빚어오게 되었다.

<조선일보>의 <광수생각>은 분명히 상당한 완성도의 디자인 감각으로 새로운 형태의 신문만화를 대중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광수생각>이 초반에 보여준 형식적 활력은 곧 어정쩡한 감상주의와 <조선일보>식의 윤리관 속에 갇혀 그 힘을 잃어갔다. 만화가의 아이디어 빈곤도 흘러간 유머를 재활용하거나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채근담>류의 경구를 적당한 그림으로 풀어내는 무기력함으로 전락하게 된다. 가장 나쁜 것은 <광수생각>이 보여준 잘못된 선례들이 아직도 신문만화 속에 잔존하고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화 자체는 불성실하게 풀어내놓고 말미에 적힌 한마디로 적당히 얼버무리며, 게다가 그것으로 얄팍한 설교까지 하려는 모습을 왜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면에서 박광수와 정반대에 있었던 이우일은 <도날드 닭>을 통해 주류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파괴적인 상상력과 불건전한 생각을 가진 그가 보수 언론에서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심리적 부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종적 작품에 나타난 아이디어들은 어딘가 엑기스가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후에도 이우일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하며, <우일우화> 등의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의 새로운 만화들은 논리적 위반를 통해 웃음을 선사하는 부조리만화의 성격이 강한데, 한국만화의 전통에서 찾기 어려운 새로운 흐름을 가져온 것은 높이 평가하지만 동어반복의 성격이 강해 아직도 ‘실험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일우화>는 화려한 외양을 가진 실험적 ‘출판’이었는지는 몰라도,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만화들을 왜소화시킨 측면이 강하다. 팬시화의 우려도 없지 않다.

이제 이 흐름은 <비빔툰> <또디> 등 소시민의 삶에 기반한 활력있는 신문만화와 <마시마로>나 <졸라맨>과 같은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양쪽으로 넒은 팔을 벌리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흐름을 타고 있지만, 스포츠 신문의 전형적 코드에 묻혀 구태의연한 태작으로 머물러 있는 작품들도 상당수 있다. 이 새로운 경향은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매체의 한계와 팬시화의 위험성이라는 두개의 난제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