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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AT] 제발 닥치고 쓰기나 했으면
전계수 일러스트레이션 황정하(일러스트레이션) 2012-08-17

흐음… 그래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자. 집중해서 쓰면 일주일 만에도 걸작이 나올 수 있어. 충무로의 투자자와 배우들이 침을 질질 흘릴 만한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쓰는 거야. 모두 내게 시나리오 한번 보여달라고 안달하겠지?

그래 문제는 집중력이야. 그렇지… 나는 다 괜찮은데 집중력이 부족한 게 좀 흠이야. 집중력… 어떻게 하면 집중력을 키울 수 있을까? 요가나 명상센터에 가볼까? 흐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날도 더운데 명상 DVD를 하나 사서 아침마다 집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매트도 하나 필요하겠어….

아무튼 집중을 해야 해. 집중… 집중… 그런데 어디에 집중하란 거지? 시나리오지 이 자식아! 그럼 네가 이제 와서 무슨 백일장 글짓기하겠니? 넌 지금 다음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잖아!

그래 난 지금 추리극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 에드거 앨런 포 유의 고전의 향기가 물씬한 정통 추리물이야. 아니 움베르토 에코풍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역사와 신학의 문제가 중요한 테마가 될 테니 말이야. 엔딩 크레딧에는 ‘보르헤스의 무덤에’라고 쓸 거야.

흐음… 그런데 이런 거창한 주제를 다루다가는 투자를 못 받을지도 몰라. 좀더 장르적인 접근이 필요해. 엘러리 퀸 스타일은 어때?

그래 나쁘지 않지…. 근데 내가 읽어봤던가?

제발 좀! 그놈의 스타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일단 쓰기나 해. 출판할 거야? 영화로 만들 거잖아!

그래 다시 문제는 집중력이야. 스타일은 접어두고 일단 쓰는 데 집중하는 거야. 쓰다 보면 내 스타일이 나오겠지. 아무튼 내 다음 영화는 추리극이야. 남해 외딴섬에서 벌어진 등대지기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부산 남부경찰서의 신참 형사가 연락선을 타고 건너오지. 살인사건을 제보한 건 중년의 가톨릭 신부야. 그는 얼굴에 수술 자국이 있어 웃을 때마다 표정이 일그러져.

마치 기타노 다케시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을 캐스팅하는 건 어때? 나이도 알맞고 인상도 딱이야. 존재감도 훌륭하고.

아… 근데 한국어가 안되는구나. 성격도 더럽다고 들었어….

흐음… 자꾸 이럴 거야?

그래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시작하자. 우리의 주인공은 두명이야. 그러니까 이른바 투톱이지. 20대 신참 형사와 50대 가톨릭 신부가 그 주인공이야. 신참 형사는 의욕이 넘치는 젊은 마초이긴 하지만 이성의 힘을 믿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극의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오르페우스 같은 인물이야. 형사의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어딘가 모르게 애수가 깃든 이름이면 좋겠어. 흐음… 주월?

에이 그건 <러브픽션> 주인공 이름이잖아! 뭐 하는 거야 지금! 이름 그딴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 지랄로 고민이야! 벌써 두시잖아 젠장! 제발 닥치고 쓰기나 해!

가톨릭 신부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야…. 일본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지…. 흐음… 근데 기타노 다케시 최근작이 뭐더라. 보려고 했었는데 놓쳤어. 그래 <아웃레이지>야. 이게 DVD가 나왔나? … 이런~ 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