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PIFF Daily > 17회(2012) > 영화제 소식
[special] 시대와 국가가 원했던 쾌남

‘한국영화의 남성 아이콘: 머슴에서 왕까지’ 회고전에 초청된 배우 신영균

<쌀>

신영균이 1960년 32세라는 늦은 나이로 영화계에 데뷔하던 당시 한국영화계에는 기라성 같은 선배 김진규와 최무룡이 버티고 있었고, 후배 신성일이 막 스타로 발돋움 하려는 참이었다. 적어도 외모만 놓고 봤을 때, 그가 이들 배우들과 경쟁하여 최고의 스타가 되기는 어려워보였다. 선 굵은 얼굴과 건장한 체격은 당대 주류를 이루었던 멜로드라마의 배우로서는 적당치 않아 보였고, 이는 당대 최고의 스타로 성장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핸디캡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핸디캡은 한국영화계 내 신영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 마침 쿠데타 이후 새로운 남성 동맹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한국영화계는 정통사극이라는 새로운 남성적 장르가 등장하고 있었다. ‘미남보다 쾌남’이라 불렸던 신영균의 성공은 이 시대적 변화가 반쯤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왜 신영균인가: 시대가 요청한 실천적 캐릭터

신영균의 이미지는 고뇌하는 이미지의 김진규, 낭만적인 비판가 최무룡, 젊음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한 청년 신성일과 다르다. 말하자면 그는 고뇌하는 비판적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실천가적 지식인상을 대변했다. 그가 스타덤에 오른 1960년대 초는 한 번의 혁명과 한 번의 쿠데타를 겪으면서 국민 사이에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열망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기간이었다. 이 시대가 요구했던 인물은 실용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국가 건설의 동력이 되는 적극적이고 ‘건강한’, 실천적 지식인, 즉 지•덕•체를 겸비한 주체였다. 탁상공론과 구체제적 전통, 관념적인 형이상학이 일거에 구제의 유물로 치부되는 생산과 실천의 시대에 그가 호명된 것이다. 외향적이고 발산적인 연기 스타일과 발성, 선 굵은 외모 등 그의 배우로서의 자질 뿐 아니라, 최고의 명문대를 나온 레슬링 선수 출신의 치과의사라는 이력이 그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올려놓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 곧바로 연상되는 작품이 <상록수>(신상옥, 1961)와 <쌀>(신상옥, 1963)과 같은 계몽영화들일 것이다. 특히 신영균이, 수로를 끌어오기 위해 산을 뚫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굳건한 의지력으로 실행하는 청년 용이로 분한 <쌀>은 신상옥의 민족주의-박정희의 군사‘혁명’-신영균의 강건한 실천가 이미지라는 삼박자가 절묘 하게 결합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를 좀더 확장하면 <신입사원 미스터 리>(김기덕, 1962), <로맨스 그레이>(신상옥, 1963)와 같은 생활 속의 개혁가, <쾌걸 흑두건>(장일호, 1962) 등에서의 의적 이미지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요청에 반공영화가 빠질 수는 없다.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와 같은 한국영화의 대표적 반공 전쟁영화에서 그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던지는 호방한 군인의 역할을 맡았다.

신영균이 항상 국가건설, 혹은 조국애(반공)의 아이콘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처음으로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연산군> 연작(신상옥, 1962)에서 폭군의 역할을 맡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가 분한 연산은 고뇌하는 무력한 왕이 아니라 조선조의 구제에 저항하고, 전통을 비웃는 파괴적 실천가였다.

<대원군>

<빨간마후라>

신상옥 감독을 만나 만개하다

신영균이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의 전속배우로 초기 배우 생활을 시작했으며, 신상옥의 많은 영화, 특히 사극의 주인공을 도맡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영균은 신상옥의 페르소나였다. 다소 위험하지만, 단순하게 이분하자면 멜로드라마는 사적영역, 사극은 공적영역의 장르다. 두 번의 ‘혁명’ 이후 공적인 시간이 국가와 함께 등장했던 때, 신상옥은 <성춘향>으로 사극의 가능성을 타진한 뒤 <연산군> 연작으로 소위 본격 사극의 도래를 알렸다. 국가의 시간, 국가라는 무대. 그 무대를 신영균은 마음껏 뛰놀았다. 연극으로 다져진 그의 과잉적 제스처가 이 큰 무대에 어울렸고, 배우의 연기 잠재력을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신상옥의 연출 스타일은 그와 최상의 궁합이었다. 그는 <연산군> 연작, <철종> 연작(1963), <대원군>(1968), <김옥균과 삼일천하>(1973) 등 민족주의와 허무주의가 기묘하게 동거하는 신상옥 특유의 사극 속에서 때로 비운의 지도자로, 폭군으로, 권력을 위해 광대 짓을 마다않는 효웅으로, 대안 없는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신영균이 없었다면 신상옥의 사극은 상당 부분 빛을 잃었을 것이다. 유사한 시기 그는 임권택의 홍국영 연작, <망부석>(1963)과 <십년세도>(1964)에서 지혜와 충절로 정조를 왕위에 올렸으나, 권력의 씁쓸한 본질을 깨닫고 퇴장하는 개혁가 홍국영의 역할을 맡았다. 임권택과 신상옥이 사극에 접근하는 태도와 연출스타일은 상당히 다르지만, 신영균의 이미지만큼은 신상옥 사극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무숙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비굴와 위엄, 부귀와 비천

신영균의 중•후기 대표작이라 할 <대원군>에서 그는 안동 김씨 일파의 눈을 피해 속내를 숨기고 살아가는 비굴한 흥선을 연기한다. 이 영화의 매력은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비굴한 상황을 웃음으로 감내해내던 흥선이 언뜻 속내의 분노와 야망을 드러내는 순간에 극대화된다. 신영균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 그와 같은 비굴과 위엄, 부귀와 비천의 두 얼굴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을까.

사실 ‘머슴에서 왕까지’라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회고전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영균은 왕의 역할만큼이나 하인이나, 하층민, 떠돌이의 역할을 자주 연기했다. 그러나 세간의 평과 달리 그가 팔색조의 배우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하층민을 연기할 때조차도 광기와 지성, 제어되지 않는 욕망과 치열한 의지를 함께 보유한 자신만의 복잡한 캐릭터를 창조했다. 그의 이러한 이중성이 제대로 형상화될 경우 <물레방아>(이만희, 1965) <갯마을>(김수용, 1965) <산불>(김수용, 1967)과 같은 걸작이 만들어진다. 그의 폭발하는 광기는 영화의 에너지를 극대화시키고, 이 전력을 다한 돌진이 비극적인 결말과 만남으로써 그만큼 심유한 회한, 반성, 허무를 낳는다. 그것은 그가 하인의 역할을 맡을 때나 왕의 역할을 맡을 때나 유사하다. 이 허무의 이미지는 <무숙자>(신상옥, 1968)와 같은 유사 서부극의 떠돌이 ‘히어로’로 변주되기도 한다.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 그의 영화이력에 특이한 작품을 만나게 된다. 멜로드라마의 대표작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1968)이다. 이 영화 속에서 그는 유부남임을 본의 아니게 속이고 젊고 착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도 몰랐던 자식을 맡게 되는 우유부단한 중년 남성의 역을 맡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만듦새나 신영균의 연기력과 무관하게, 모성 멜로드라마의 대표작인 이 영화가 신영균에게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략 1970년대 초, 정확히는 1973년을 지나면서 그는 영화 현장으로부터 멀어진다. 당대 만연했던 B급 장르영화들 속에서 그의 자리를 쉽게 찾기가 어려웠던 탓도 있고, 그가 사업이나 영화단체, 정치 등에 관심을 가졌던 탓도 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고귀한 순교를 택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는 신영균 최후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