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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 업] 민족성보다는 인간에 관한 고민을
윤혜지 사진 최성열 2012-10-16

고려인 4세, <하나안>의 박루슬란 감독

박루슬란 감독은 고려인 4세다. 타슈켄트사범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뒤 한국으로 유학 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수학했다. 장편 데뷔작인 <하나안>으로 제14회 타이베이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박루슬란 감독은 의외로 자신이 고려인이라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안>을 고려인의 삶과 미래에 관해 말하는 영화일 거라고 짐작했다면 그것은 틀렸다. 고질적인 우울함과 싸우며 삶을 개척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 그것이 <하나안>이다.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면서도 오히려 ‘하나안(약속의 땅)은 없다’는 박루슬란 감독. 고려인으로서의 그의 삶과 그가 생각하는 ‘약속의 땅’에 관해 짧은 대화를 나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라면서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봐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 =동포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주민 국가 중에서 고려인 비율은 우즈벡이 가장 많다. 사춘기를 지날 무렵 나와 닮은 사람들을 찾게 됐다. 서로 만나고, 친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태권도와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된 거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2001년에 영화를 시작했는데 그때 신문에 광고가 났다. 한국에서 영화 촬영팀이 왔는데 남자주인공을 고려인으로 캐스팅한다더라고. 몇번 찾아갔는데 <나의 결혼 원정기>의 황병국 감독님은 처음에 거절하셨다. 그런데 자꾸 만나게 되니까 결국 뽑아주셨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너무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돈도 안 받고 그때는. 그 덕에 많이 배웠다.

-왜 하필 ‘영화’였나. =우즈벡에선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없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 여기서 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본 거다. 고민했다. 난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어느 날 극장에 갔다. 영화는 재미없었고, 사람들도 두세명뿐이었다. 대사가 많은 영화였는데 난 한국어 수준이 낮아서 자막을 읽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때 영화를 직접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없어지지 않더라. 어떤 재일동포가 와서 같이 뭔가를 찍자고 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그래서 같이 막 찍었다. 졸업식 때 공개했는데 사람들 반응도 좋았고, 난 영화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우즈벡 청년들만의 고민은 아닐 테고, 세계의 많은 청년 세대가 우울함과 피로와 분투하며 산다. <하나안>은 그걸 세밀하게 포착한 동시에 결국 희망을 이야기한다. =고려인에 대한 영화를 안 만들려고 노력했다. 동포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 다들 한국에 대해 이상한 애정과 희망을 갖고 거기로 가려고 노력한다. 난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나름의 사는 세계가 있고, 고려인이라고 모두가 ‘한국에 가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걸 넘어서 온 세계 사람들이 다들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민족적 정체성 문제보다는 인간에 관한 고민을 담고 싶었다. 우울함 속에도 희망이 있다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장면들이 리얼하다. 사전 조사는 어떻게 진행했나. =예산이 없다보니 새로운 걸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도 다 실제 물건이다. 마약하는 장면 같은 건 실제로 보진 못했고 마약했던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의 얘길 들으면서 내가 상상하고 느낀 부분을 추가했다. 나중에 그 사람들이 보고 난 뒤 한 말이 지금까지 나온 영화의 마약 신들 중 가장 리얼하다고 하더라. 돈은 없었지만 진정성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한국에서 ‘하나안’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은 지금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자살률은 세계 1위다. 자본주의 가치관이 만들어내는 ‘돈이 있어야 잘살 수 있다’는 건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돈 없는 인생을 살면서도 나름의 행복을 찾아 잘 사는 사람은 많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젊은 청년이 질문하더라. “주인공들은 이렇게 우울한 인생을 살다가 죽을 사람들인데 굳이 왜 이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냐”고. 그땐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아니지 않나….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나.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주인공이 한국인이고, 배경은 모스크바로 ‘본’ 시리즈 같은 액션영화가 될 것 같다. 또 하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찍는데, <아메리칸 뷰티> 같은 느낌으로 남자들의 감정에 관한 영화를 구상 중이다. 그러면서도 남자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둘 다 아직은 트리트먼트 단계인데 이번엔 제작사와 계약해서 시나리오도 투자받고 자료 조사도 더 꼼꼼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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