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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시간과 기억의 패러독스

<환송대> La Jetee, 크리스 마르케, 1962년

영화 <환송대>.

마이크 올드필드의 <투 프랑스>는 기억의 패러독스에 관한 노래다. 프랑스인지 어딘지 모를 공간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불려 나오지만, 화자는 당신이 결코 프랑스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투 프랑스>는 기억을 판타지 혹은 꿈이라고 정의한다. 가보지 못한 곳, 그러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정체는 무엇일까. <루퍼>의 주인공 조는 프랑스에 가고 싶어 프랑스어를 배운다. 올드필드의 노래처럼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에 가지 못한다. 그는 왜 프랑스에 가고 싶었을까, 나는 몹시 궁금하다.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젊은 조는, 미래에서 온 조로 분한 브루스 윌리스가 17년 전에 타임슬립 실험에 투입된 인물로 나온 <12 몽키즈>를 경유해, 다시 <12 몽키즈>가 영감을 얻은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의 화자와 랑데부하려는 게 아닐까. <12 몽키즈>의 콜이나 <환송대>의 화자가 그러하듯, 미래의 비극을 바꾸어야 할 조는 <환송대>의 운명적 장소인 파리 오를리 공항 어딘가로 진입하기를 갈망하는 게 아닐까(여기서 오를리 공항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개념이다). 어쨌든 조는 오를리 공항뿐만 아니라, 시간의 이동이 가능해진 미래의 어느 지점에도 닿지 못한다.

브루스 나우먼의 설치미술작품 <복도 인스톨레이션>.

내 굳은 머리는 시간의 선형성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이동이 가능한 영화에서도 나는 시간의 패러독스에 빠졌음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브루스 나우먼은 설치미술작품 <복도 인스톨레이션>(1970)을 통해 ‘시간이 과연 일직선상에 놓인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복도 사이를 걷던 관람자는 비디오와 모니터 장치를 빌려 ‘현재, 미래, 과거’가 한순간에 겹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12 몽키즈>와 <환송대>의 주인공은 자신을 시간의 방문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방문할 수 있음에도 시간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시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두 남자가 운명을 뒤집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것은 필연이다. <루퍼>의 젊은 조는 다르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 그는 미래에서 온 자신을 ‘기억의 방문자’로 여기게 된다. 시간은 기억의 형태로 머릿속에 자리잡는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곧 과거, 현재, 미래의 기억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제는 미래의 기억이다. 미래라는 지점에 가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기억한다는 말인가. 미래의 기억인즉 ‘가상의, 상상의, 창조된, 조작된, 혹은 착각의’ 기억 중 하나로 보면 안될까. 결말에서 젊은 조는 어떤 행동을 통해 미래를 바꾸려 하는데, 실상은, 그가 단순히 미래를 바꾼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희망이든 상상이든 상관없이 그는 그가 바꾼 미래를 확신하고 그것을 기억했을 터다. 나는 그가 기억을 바탕으로 역으로 행동했다고 본다. 프랑스에 가지 못한 조는 기실 프랑스라는 미래에 이미 머물렀던 셈이다. 기억의 패러독스를 풀어 시간의 패러독스에 맞선 조는 그 이유로 죽는다. 콜도 죽었고, 환송대의 그도 죽었고, 마르케도 지난 7월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돌며 시공간을 기록했던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죽음, 시간과 소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아마존 위시리스트에 묵혀두었던 그에 관한 책 한권을 이제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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