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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2002-01-30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누군가 강준만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을 때 나는 주저없이 ‘근대화의 기수’라 말한다. 그는 ‘조선일보 문제’를 비롯해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사회의 작동원리가 되다시피해온 이런저런 전근대적인 습속들을 샅샅이 ‘발견’해냄으로써 한국인들이 비로소 근대적인 정신을 마련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강준만씨는 참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그는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지점에 끊임없이 의견을 낸다. 그의 의견은 철저하게 제도 시스템의 테두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에는 여러 차원이 있고 늘 제도 시스템의 테두리가 충분한 건 아니다. 제도 시스템을 벗어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지점에서 강준만씨의 의견은 종종 무리한 훈수가 되기도 한다. 특히 좌파적 활동과 관련한 그의 의견이 그렇다.

근래 그가 좌파에 거듭하는 주문은 이른바 도덕적 순결주의에서 벗어나 시장과 언론 같은 오늘의 제도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얼핏 유익해 보이는 그의 의견은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무리한 훈수일 뿐이다. 좌파란 오늘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좌파임을 천명한 순간부터 오늘 시스템에서 적극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일은 ‘선택’이나 ‘적극성’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 언론의 경우를 보자. 한국엔 맨 오른쪽의 <조선일보>에서 맨 왼쪽의 <한겨레>까지 여러 신문이 있다. <조선일보>의 극우성이야 새삼 말할 게 없지만, 맨 왼쪽인 <한겨레>의 이념 역시 좋게 보아 중도보수쯤이다. <한겨레>에 진보적 기사가 적게 실리는 것은 흔히 말하듯 “<한겨레>가 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신문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제도 언론이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선전 수단이다. 제도 언론이 담을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는 그 사회의 지배계급이 허용할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와 같다.

언론학자인 강준만씨가 그런 이치에 닿지 않는 훈수를 하는 건 그가 순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념 때문이다. 자신의 말대로, 강준만씨는 오늘 시스템,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우파다. 그가 제도 언론에 “진보적 기사를 좀더 싣는 일이 자본주의 체제의 건강을 위해 좋다”고 주문하지 않고, 좌파에 “도덕적 순결주의에서 벗어나 제도언론을 활용하라”고 주문하는 건 더도 덜도 아닌 우파의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이다.

나는 강준만씨를 ‘근대화의 기수’라 부르지만, 정작 그는 ‘근대’니 ‘극우’니 하는 개념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세상에 의견을 내는 수단인 그의 글은 언제나 “나쁜 놈들을 솎아내자”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쁜 놈과 좋은 놈’이라는 도덕적 차이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가의 이념적 차이로 구분된다. 모든 계급에 나쁘거나 모든 계급에 좋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일보>처럼 계급을 막론하고 사악해 보이는 신문도 어떤 계급에는 천사와 같다.

우파인 강준만씨에게 ‘좋은 놈’은 좌파에 ‘좋지 않은 놈’이거나 ‘나쁜 놈’일 수 있다. 이를테면 그가 다음 대통령으로 밀고 있는 노무현씨가 97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 보여준 빛나는 활약과 제 활약에 감격한 노무현씨의 “이제 누구든 노동운동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방자한 선언을 기억해 보라. 좌파로선 제 아무리 ‘현실적인 고려’를 한다 해도 노무현씨를 지지할 방법이 없다.

강준만씨는 언제나 ‘나쁜 놈들을 솎아내’는 일로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세계가 초국적금융독점자본과 전세계 인민 사이의 사활을 건 싸움의 와중에 있고, 강준만씨가 솎아내려는 ‘나쁜 놈들’ 역시 그 잔가지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며, 그런 모든 맥락을 포괄한 싸움으로만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겠다. 강준만씨는 내 주장을 ‘공허한 거대담론’이라 할까. 애석한 일이지만, 그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많든 적든 세상의 일부다. 그와 나는 이념적 차이를 갖는다. 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