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 감독에 대한 회고
2002-01-30

“옷 끈 하나 내리는 것도 감독하고 1시간씩 싸웠어요”

저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꿈꾸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영화배우가 됐나 봐요. 연기라는 건 자기를 없애고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환상이 없으면 힘들잖아요. 그때 결정적인 순간에 감정이 솟아나와야 해요. 캐릭터를 골똘히 연구한 건 아니었는데, 감정몰입을 수월히 한 것 같아요. 오늘의 이 영화 찍고, 내일은 또 다른 영화 찍고, 이런 상황인데도 몰입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는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민이 뭐냐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습관적으로 이런 상황에는 이렇게 하고 이런 표정 짓고, 저런 때에는 저렇게 하고. 아니까, 변화를 줘야 되는데도 잘 안 돼요. 그게 많은 작품을 할 때의 고충이죠. 현실적으로는 화장 바꾸고 머리 바꾸는 것. 사극하고 현대극을 번갈아 하면, 사극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니까 현대극으로 갈 때 적어도 머리를 감아야 해요. 그럴 때가 너무 힘들죠. 하루에도 번갈아 가면서 찍으니까.

촬영하다 잠들어 ‘컷’ 해도 못 일어나

작품을 찾아보면 제목이 생각날 텐데, 나운규 아드님인 나봉한 감독님과 촬영을 하는데(<독수공방> 혹은 <방울대감>) 헛간에서 딱 쓰러지는 장면이었는데 컷 해도 안 일어났어. 가마니에 기대니 라이트는 따뜻하지, 피곤하니깐 잠이 저절로 오잖아. 그러면서도 의상뿐만 아니라 소도구까지 우리가 다 챙기고, 메이크업도 다 했어요. 연결 신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저희들이 다 챙겼어요. 머리가 핑핑핑 돌아가야 돼요. 그렇게 바빴지만 음악 들을 시간도 있었고, 뭐 좋은 음악회가 있으면 가기도 했고, 발레도 본 적 있어요. 병원에 입원한 적은 없는데 한번은 병원에 쉬러 들어간 적이 있어요. 집에 있으면 그것도 안 되니까. 그때 당시 배우들은 다들 건강했나 봐요. 아파서 펑크냈다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스케줄이 겹치거나 해서 촬영이 지연된 적은 있지만. 로케이션인데 비가 오면 하루종일 잘 수 있었어요. 그래서 비오는 날이 너무 좋아요.

그 당시 정임이하고도 하고, 문희랑도 하고, 다 같이도 영화를 찍기도 했는데(<결혼교실>, 1970, 정인엽 감독) 사람들 말이 사실과는 달리 과장된 경우가 많아요. 이런 이야기도 있더라구요. 서로간 경쟁이 심해서 이 친구가 이런 옷을 입고 가면 얼른 내다보고 다른 옷을 입고 그랬다고. 그 당시는 옷도 다 우리가 준비를 했었어요. 미용사는 있었지만 화장도 우리가 하고, 색깔 선택도 우리가 했어요. 시나리오 보시면(윤정희씨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와 출연을 제안받은 영화의 시나리오 600편을 영화진흥공사에 기증했다) 알 거예요. 무슨 신에 어떻게 하고 무엇을 입고가 다 적혀 있어요. 다른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다고 옷을 바꿔 입지는 않거든요. 그 역할이 있는 건데, 옷을 몇개씩 준비해가서 바로 바꿔 입는 상황도 아니고.

과장된 게 있긴 했지만 열심히는 했죠. 같이 출연할 땐, 자기 혼자 주연할 때보다는 조명이 나한테 좀 왔으면 싶고, 내 역할이 더 컸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건, 인간의 본능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참 재밌었어요.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트리오가 존재했던 것 같아요. 각자가 포지션이 뚜렷하고 성격이 뚜렷했기 때문에 필요 이상 피곤하지 않았고, 또 각자 자기와 호흡이 맞는 감독도 있었고. 저 같은 경우는 김수용, 김기덕, 이성구 감독하고 호흡이 맞았어요. 신상옥 감독도 최은희씨 빼놓고는 저하고 제일 많이 찍었을 거예요.

편안했던 김수용 감독

김수용 감독은 편안해요. <안개>(1967)로 처음 만났어요. <안개>는 스타일리시한 영화라고 해서 까다롭지 않을까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참 재미있게 찍었는데 <안개>는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어쩜 그렇게 촌스럽게 나오는지 그런데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제가 거기에서 <목포의 눈물>을 배웠어요. 작곡가 길옥윤씨가, 그분이 스튜디오 오셔서 노래를 가르쳐 주시고… 낭만적이었던 것 같아요. <안개> 때 힘들었던 건, 신성일씨하고 하는 러브신이에요. 표정을 어떻게 짓느냐 했더니 김수용 감독이 “배 아픈 것 같이 하라” 그랬어요. 신성일씨가 다리 흔들어주고. 러브신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기 힘들어요.

그때 당시는 우리가 옷끈 하나 내리는 것도 싸우니까. <장군의 수염>(1968) 때 제가 등을 좀 내놔요. 그것 때문에 1시간 동안, 그때 우리 스케줄이 1시간이면 굉장한 건데, 이성구 감독하고 싸웠어요. 옷 벗으려고 영화배우 됐냐고 그랬어요. 결국 거기서는 그렇게 안 했어요. 그뒤로 감독하고 친해져서 영화를 같이 많이 했는데, 녹음할 때 그러더라구요. “미스 윤… 내 말을 들었으면 더 좋았잖아, 화면이.” <장군의 수염> 다음 스케줄이 <내시>(1968)였던 것 같은데, 비슷한 일이 일어났어요. 이성구 감독하고 싸우지는 못하고 병풍 뒤에서 좀 울다가 찍었어요. 조금 이게 등이 좀 내려갔을 거예요.

그뒤로 우리는 러브신을 해도 대역이 했어요. 얼굴 나오는 것만 우리가 하고 그 외에는 전부 다 대역이에요. 대역을 하면 몸이 예쁜 여자가 나와야 되는데 안 그럴 때가 자주 있잖아요. 남들은 주인공 여배우 몸으로 알고 있잖아요. 신상옥 감독과는 이때가 처음 만난 거예요. 그 당시 이미 영화 거장이었죠. 첫 촬영이 안양스튜디오의 ‘감옥’이었어요. 그때 그 스튜디오에 처음 갔어요. 그 이후에는 단골이 됐지만. 그렇게 긴장이 되었어요, 만남이 어떻게 돼야 하는가 하고. 감독님은 카메라를 직접 메세요. 그래서 배우를 풀어놓더라구요, 마음대로 하라고. 참 연기하기가 편안하고 자연스러웠어요.

유현목 감독, 배우에게 자유 안 줘

이만희 감독과는 <싸리골의 신화> 두편을 했어요. <싸리골의 신화>(1967)는 저는 절대로 이런 영화 안 하겠다, 그랬던 영화예요. 저 되게 그런 거 무서워하거든요. 감독님이 굉장히 유머가 있어요. 그리고 목소리가 매력 있어요. 레디 고 목소리가 너무 괜찮아요. 유현목 감독은 <분례기>(1971)를 찍는데 정말로 뭐랄까, 브레송과 비슷해요. 브레송의 <돈> 촬영장을 갔는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걸으라고 정해주고 그대로 시켜요. 배우한테 자유를 안 줘요. 어떤 컷은 60번을 찍었대요.

유현목 감독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배우한테 자유를 주기보다는 자기 선이 뚜렷해요. <분례기> 때 허장강 선생님이 연기를 그렇게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자갈치 시장을 간다고 그러면, 거기서 한 사람 한 사람 인물을 놓치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니가 당장 그 역할을 안 하더라도 항상 머리에 담아두라고, 항상 신경 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김승호 선생님하고 많이 하셨잖아요. <박서방> <마부> 얼마나 자연스운지.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욕심보고 그렇게 열심이라잖아요. 예를 들어서 황정순씨하고 촬영을 하는데 서로 클로즈업을 많이 하려고 동성도 아니고 이성인데도 카메라 앞에 얼굴을 더 들이대고 그랬대요. 그렇게 준비도 열심히 하시고. 그런데 <분례기>가 필름이 없다면서요? 그게 71년인데.

<석화촌>(1972) 찍을 때는 이런 게 기억나네요. 정진우 감독이 태풍 경보가 내렸는데도 떠나야 한대요. 도저히 홍도까지 갈 수가 없는데도 그래요. 배우들은 다 죽을 지경이고, 멀미가 나서. 흑산도에서 스톱했어요, 중간에. 죽는 줄 알았어요. 홍도가 많이 변했는데 그 당시는 먹을 것도 없고 잘 데도 없고 그랬거든요.

<강명화>(1967)를 하고 나서 이미지가 달라졌어요. 고전무용도 했고 발레도 했고, 한복 입고 움직이는 매너 같은 게 아무래도 몸에 젖어드니까. 회고전 때 그 영화를 틀었는데, 내 다른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 때마다 그런 걸 느껴요. 감독들 만나면서 변해가는 건 확실하고…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 변하는 건 제가 느끼는 거구요. <저 눈밭에 사슴이>(1969)는 만날 착한 여자로 나오다가, 원래 주인공은 착하잖아요, 못된 여자 역을 하니까 재미있었어요. 신영균씨가 교수고 최은희씨가 부인인데 제가 그 집을 망쳐버리는 역이었지요. 드라마 작가 김수현씨의 데뷔작이죠.

<무녀도>(1972)는 좀 잘못 전달된 게 있어요. 김지미씨 캐스팅 가지고… 누가 쓴 기사를 봤는데… 그거는 후배인 내가 선배 김지미씨 역할을 뺏었다, 그렇게 났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러진 않아요. 감독에게서 프로포즈 왔으니까 수락을 하는 거죠. 결정이 다 된 걸 후배가 뺏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건 순서가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저도 그렇거든요. 계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스케줄이 안 맞을 경우 다른 배우가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건 자유잖아요. 감독이 저를 원했고 제작자가 원했고,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그런데 이게 어떤 상황까지 갔냐 하면… 이것 때문에 저를 배우협회에서 제명을 시켰어요. 더 심한 이야기는 말할 기분이 안드네요. 저를 제명을 시켜서 영화촬영을 못하게 했어요. <무녀도> 촬영이 아니고 다른 영화를, 출연 못하게 했어요. 그러고보니 어이가 없는 일이 또하나 생각나네요. 제가 파리에서 지내면서 한국에서 <위기의 여자>(1987) 촬영을 할 때 일이에요. 한창 촬영을 하고 있는데, ‘외국에 사는 배우는 한국영화를 촬영할 수 없다’고 배우협회에서 결정을 한 거예요. 저만 그렇게 하기가 그러니까 몇 사람도 못하게 한다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병원 촬영을 하고 있는 중간에서 영화가 스톱되었어요. 덕분에 다시 파리로 갔죠. 한달 동안 제 볼 일 다 보고. 그러다가 오케이 해결됐다고 해서 다시 들어왔어요. 참 기가 막혔죠. 대담 안정숙/ 전 <씨네21> 편집장 구술 정리 구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