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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스> O. S. T
2002-01-31

도돌이표의 감옥

이 영화를 감독한 신예 아메나바르는 명백하게 히치콕적인 환상을 연상시킨다. 히치콕의 스릴러, 특히 <싸이코> 같은 영화가 망령인 체하는 사람의 고장난 무의식이 어떻게 오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반대다. 사람인 체하는 망령의 고장난 무의식이 어떻게 오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이것은, 히치콕을 뒤집어놓은 재미난 트릭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히치콕에 대해 언급하면서 `주인공의 환각적 고정관념`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하여 진실은 타자의 공동체 속에 있지 않고 정신병적인 태도를 취한 주인공의 환각 속에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니콜 키드먼의 매력. 지젝에 따르면 히치콕의 영화에서 `가면 밑에 숨겨진 비밀의 폭로는 가면 그 자체가 발휘하는 매혹적인 힘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다`. 이 영화도 그렇다.이 영화의 음악은 특이하게도 감독 자신이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보기에도 무척 영민해 보이는 그는 참 재주가 많은 사람인가보다. 음악도 손색없다. 그의 주 멜로디는 어딘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풍이라 느껴진다. 환상적인 고음의, 이미지를 붙들듯 말듯 울리는 목관 소리는 안개 자욱한 이 영화의 배경과 잘 어울린다. 주 멜로디가 흐른 뒤에 흩어지는 화음들, 그리고 그뒤에, 심벌과 스트링의 트릴이 어울려 빚어내는 악센트, 그 다음, 금관의 신경질적인 불협과 길게 흐르는 저음, 특이한 타악기 소리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긴장감.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히치콕이 만든 고전적인 스릴러의 긴장감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그 다음은?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니콜 키드먼이 신부님을 데려오겠다며 나가는 장면. 아마도 이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될 명장면이 아닌가 싶다. 신부님은 없다. 그러나 그는 안개 저편에, 죄없음을 가장하는 니콜 키드먼의 염원 혹은 이데올로기로 존재하며 이 망령의 세계를 안정시키기도 하고 짓누르기도 한다. 안개 속에 길도 없다. 그리고 끝내는 니콜 키드먼도 없다. 감독은 이 대목에서 서정적인 목관만을 가지고 박진감 넘치는 긴장을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음악들은 매우 도식적으로 움직인다. 처음엔, 들린다. 멀리서. 환상적으로. 예를 들어 오래된 피아노 한대. 거기서 울리는, 쇼팽의 <녹턴>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소리. 그것이 잠들려는 니콜 키드먼을 일으킨다. 그 다음엔, 다가간다. 심벌과 스트링. 저음의 목관. 그 다음엔, 문이다. 문 앞까지 클로즈업. 다음엔, 거기까지 질질 음악 소리가 끌리다가 갑자기 쾅! 문이 열린다. 효과음 동반. 그러나 문 열린 다음엔 다시 아무도 없다. 처음의 환상적 멜로디로 돌아간다. 관객은 한숨 돌린다. 그러나 그 암시적인 드뷔시풍의 멜로디가 다음 시퀀스를 준비한다. 이 영화는 그 도식에 도돌이표를 찍어놓고 계속 돌리며 변주한다. 스릴러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순환 구조를 외워둬라. 써먹기가 아주 좋다. 다시 돌리기만 하면 된다. 관객은 그 순환구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거의 호흡이 멎을 듯한 스릴을 느끼며, 감독이 의도한 대로 내러티브의 환상 속으로 빠진다. 관객의 공포까지를 포함하여, 스릴러는 그 도식 자체에서 재미가 생성된다. 사람들은 놀라며, 다 알고 즐거워한다. 끔찍하다/재미있다, 다 알고 있다/드러나지 않는다의 디코토미, 즉 대립적 이항이 이 지점에서는 함께 존재한다. 그게 장르영화다.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