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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죽일 만큼 사랑해
신형철 2013-01-09

죽음과 사랑에 대해 <아무르>가 제기하는 질문과 대답

인생이라는 사건의 가장 확실한 팩트는 생로병사다. 그것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없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전히 모른다. 하물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읽고 들어 알고 있는 것들은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앎은 우리가 실감 혹은 절감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을 읽고 지옥을 알겠노라 말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래서 나는 모른다. 말년에 후두암에 걸려서 입에서 끔찍한 냄새가 나자 사랑하던 개조차도 더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게 되었을 때 프로이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모르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아이리스 머독이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텔레토비가 나오는 프로그램에 넋을 놓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 존 베일리의 기분은 또 어땠을지를 모른다. 미하엘 하네케가 만든 이 영화 <아무르>(Amour, 2012)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안느(에마뉘엘 리바)와 그녀를 돌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조르주(장 루이 트랭티냥)를 지켜보는 일은 참혹했다. 나는 울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

방이라는 관 속에 죽어 누워 있는 안느의 모습을 보여준 뒤에 화면은 과거의 연주회장으로 이동한다. 프레임의 가운데 왼쪽쯤에 노부부가 앉아 있다. 연주가 시작되어도 카메라는 객석을 비추고만 있다. 조르주와 안느는 각기 그들 삶의 연주자였겠지만, 신이 죽음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그저 수많은 관객 중 한 사람이 될 뿐이다. 그들이 연주회장에 있는 동안 집에 도둑이 들었다. 조만간 죽음도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부부지만 이 죽음의 전조(前兆) 앞에서 두 사람의 반응은 다르다. 조르주는 범상하게 넘긴다. “도둑들은 그냥 아무 집이나 터는 거니까.” 안느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도둑이 들면 어쩌지? 생각만 해도 무서워.” 그래서 안느는 그날 밤 잠들지 못한다. 잠들면 뜯긴 문으로 다른 도둑이 들어올 테니까.

도입부의 이 에피소드는 두 가지를 넌지시 말한다. 죽음은 조르주가 아니라 안느에게 올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죽음은 ‘문’이라는 메타포를 통과할 것이어서, 문을 따고 들어온 도둑처럼 곧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도 한 마리 날아들 것이라는 것. 다음날 아침, 도둑이 뜯어놓은 문을 수리하기 위해 조르주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난 뒤에, 이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자신하자마자,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때, 안느의 예감은 실현되기 시작한다. 잠시 정신을 놓았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지만 방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도둑이 뜯어놓은 문을 수리하기 전에 이미 죽음은 노부부의 집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최초의 암시 혹은 경고다. 랄프 왈도 에머슨에 따르면 이 암시와 경고는 한층 더 모욕적인 방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빨을 뽑아놓고,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놓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게다가 좋은 용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없애주지도 않고, 우리 주변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형상들을 빚어냄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한층 격화시킨다.”(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재인용)

안느에게 찾아온 죽음은 경동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성공률이 95%인 수술이었지만 그녀는 나머지 5% 안에 들었다. 수술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상태이지만 안느는 장기 입원치료를 거부하고 귀가한다. 그리고 다시는 입원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85살에 출간한 <죽어가는 자의 고독>(1982)에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적었다. 서구사회가 문명화되면서 죽음이라는 불편한 사건은 격리되기 시작했다고, 그 격리의 공간인 병원에서는 “사람 자체에 대한 배려는 뒷전으로 밀리고 장기에 대한 배려가 우선시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그런데 죽어가는 자에게 정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정서적 고립이라고. 안느는 그녀의 삶을 아직은 자신이 통제하길 원했고, 조르주는 다른 모든 이들의 회의와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안느의 결정에 동의한다. 이제 그들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지만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그들도 모른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변화에 적응해보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안느가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때의 얘기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안느는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안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그녀가 여전히 자기 자신인 한에서 그녀는 자신의 절망을 스스로 이겨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안느에게 진정으로 상황이 악화된다는 것은 그녀의 육체가 점점 파괴되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더이상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자의 방문이 그랬다.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어서 그녀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스승으로서 제자를 맞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느를 방문한 이후 보낸 엽서에서 제자는 스승의 모습이 착잡하다는 심경을 피력하고, 이에 안느는 외려 상처를 입고 제자가 보낸 CD를 꺼버린다. 제자에게 그녀는 이제 스승이라기보다는 환자일 뿐이다. 딸과 사위의 방문도 부담스럽다. 그들의 걱정과 염려는 안느가 이제는 예전의 안느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될 뿐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안느가 말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말을 잃으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을 잃는다.

그런 의미에서 안느가 사진첩을 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언어능력에 고장이 난 이후 그녀는 거의 “엄마”(mere)와 “아파”(mal)라는 두개의 외마디 단어밖에 내뱉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완성된 문장을 말하는 때가 바로 그 장면이다. 어렸을 때의 사진을 한장씩 넘겨보며 그녀는 말한다. “아름다워.” “뭐가?” “인생이.” “(…)” “참 긴 것 같아.” “(…)” “인생은 참 길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안느의 의중을 조르주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기는 관객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아름답다’와 ‘인생은 참 길다’라는, 언뜻 보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장들을 안느는 동일한 표정과 어조로 말했다. 두 명제 사이에 안느는 어떤 접속사도 집어넣지 않았다. 이 마지막 말들은 무슨 암호처럼 조르주에게 건네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후반부를 조르주가 떠맡는다. 그가 해야만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일은 안느의 마지막 두 명제에 기대어서 그녀의 비명(“엄마”와 “아파”)의 의미를 번역해내는 일이다. 자신이 번역한 대로, 그는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결단

조르주를 위한 첫 번째 장면. 조르주는 안느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안느가 잡지에 있는 별자리 운세 따위를 소리내어 읽을 때 그는 화를 참는 데 처음으로 실패한다. 조르주가 장례식에 다녀온 날 안느가 이미 했던 얘기를 자꾸 반복할 때 그는 두번째로 실패한다. 그리고 제자가 다녀간 이후 안느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려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졌을 때 조르주는 세 번째로 실패한다. 이쯤 되면 이제 조르주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안느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다가올 고난의 시간 속에서, 안느의 변화는 예상할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의 변화는 예상할 수 없어서 두려울 것이다. 그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악몽을 꾸게 했다. 그 꿈 역시 이 영화의 핵심 메타포인 문에서 출발한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 밖으로 나가보지만 아무도 없고 복도에는 물이 차 있으며 누군가가 조르주의 목을 조른다. 이 꿈속에서 그들 부부의 집은 땅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햇볕이 잘 드는 지상이 아니라 불길한 물이 고이는 지하 같다. 이 집은 이미 땅속에 묻혀 있는 관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집은 곧 안느의 관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장면. 조르주가 고용한 두 번째 간호사가 안느의 머리를 거칠게 빗기고 그녀에게 거울을 들이미는 장면과 조르주가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장면 사이에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끼워져 있다. 열린 창으로 비둘기가 들어오고 조르주가 신속히 그것을 쫓아보내는 장면 말이다. 기독교 상징체계에서 비둘기가 성령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장면에서 그것은 그냥 죽음처럼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은유체계에서 죽음은 ‘문’으로 들어온다는 맥락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이 비둘기는 빨리 내쫓겨야 했다. 그런데 비둘기는 왜 하필 이 순간에 나타났나. 이 장면에서 감독은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열어놓은 창문으로 비둘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부에서 비둘기가 다시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비교해볼 만하다.) 그 창문은 아마도 감독이 이 비둘기 장면 전후에 나오도록 편집해놓은 그 간호사가 열어놓았을 것이다. 그녀의 거친 태도가 안느의 죽음을 앞당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잘못 들어온 비둘기처럼, 내쫓겨야 했다.

세 번째 장면. 조르주가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와 독대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에바가 방문하자 조르주는 안느가 누워 있는 침실의 문을 잠근다. 딸이 항의하자 아버지도 저항한다. 여기서 조르주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부부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일 딸조차도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정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장 아메리는 <자유 죽음>(1976)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유일해서 다른 것과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situation ve′cue)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누구도 들춰볼 수 없는 장막이 가려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르주와 안느의 ‘인생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딸에게 사과한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것은 마치 아내의 방을 관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네 번째 장면. 모두가 불안해하며 예상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조르주는 면도를 하다가 또 안느의 비명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그는 안느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십대 때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강요로 청소년 캠프에 갔었다. 하기 싫은 일과 먹기싫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그곳에서 그는 극심한 고독과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 와중에 디프테리아에 걸리기도 했다. 그는 격리되어야 했고, 어머니에게 고독과 고통을 호소하는 엽서를 보내야했다. 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조르주는 바로 그 일을 결행한다. 이 장면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조르주의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조르주이지만, 지금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안느다. “엄마”와 “아파”를 번갈아 외치는 안느에게서 조르주는 고통 속에서 엄마를 간절히 그리워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안느의 비명을 번역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끔찍한 결론이지만 이 번역이 틀렸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장면. 안느가 죽고 난 뒤 다시 비둘기가 날아든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번에는 이 새가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컴컴했으니 모든 문이 다 닫혀 있었을 것이다. 안느가 죽었으니 이번에는 그 비둘기가 제때 제대로 들어온 것이다. 필연적인 방문이므로 그것은 닫힌 문으로도 들어올 수 있었다. 조르주의 반응도 다르다. 앞에서는 불결하고 불길한 것을 몰아내듯이 내쫓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담요로 덮어서 끌어안는다. 이것은 포획이 아니라 포옹이다. (잡고 나서 다시 풀어줬으니 잡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안아보는 게 목적이었으리라.) 이 장면은 조르주가 조금 전에 안느에게 했던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 일인지를 상징적으로 복기한다. 비둘기가 처음 날아들었을 때 그는 안느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두 번째 날아들었을 때의 그는 안느에게 죽음을 선물할 수 있는 자격과 용기를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임을 깨닫고 그 일을 결행한 직후였다. 죽음을 내쫓는 일과 죽음을 끌어안는 일의 차이가 이와 같을 것이다.

사랑은 자체의 기준을 설정한다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마리의 짐승이 산다. 진화심리학은 그중 하나를 본능(instinct)이라 부르고, 프로이트는 다른 하나를 충동(drive)이라 부르며, 라캉은 또 다른 하나를 욕망(desire)이라 부른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본능과 충동과 욕망이 어떤 법칙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랑에 대한 모든 정의는 시도되는 순간 실패한다.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나 역시 그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하나다)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그 내부에 있을 것이다. “사랑은 자체의 기준을 설정한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가 금방 분명해진다.”(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이 영화에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것도 사랑이다’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죽을 만큼 사랑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죽일 만큼 사랑해’라고 말한다. 사랑에 관한 한,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일 것이다.

왜 문학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천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물론이려니와 영화 역시도 ‘이야기’라는 요소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저 문장이, 이야기라는 요소를 문학과 공유하고 있는 영화에도, 이야기라는 요소가 차지하는 그 비율만큼은, 유효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옳다. 덧붙이거니와, 좋은 이야기는 그것이 끝나는 순간 삶 속에서 계속된다.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안느의 환영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외출을 하는 조르주가 현관문을 닫는 그 매혹적인 영화적 순간에 끝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닌 것 같다. 안느의 시체가 수습된 이후 그녀의 딸인 에바가 그 집을 다시 찾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그럴 만하다. 그 장면에서는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있다. 죽음이 이미 다녀갔으니 문을 잠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에바는 거실로 간다. 늘 창가쪽 자리에 앉던 에바가 이번에는 그의 부모가 앉던 자리에 앉는다. 그런 그녀를 멀찍이 떨어진 채 지켜보던 카메라가 문득 꺼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부모의 의자를 그녀가 물려받았다. 이제는 그녀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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