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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재벌 2세 원하는 세상

SBS <청담동 앨리스>, 빈틈 사이에서 드러나 보이는 것들

<청담동 앨리스>

처음으로 압구정동에 간 날을 기억한다. 서울에 산 지 10년이 지난 때였음에도 스무살 무렵의 내 마음속 압구정은 ‘부자들만 살고, 연예인들이 길에 막 돌아다니는’ 그런 동네였다. 아는 언니에게서 로데오 거리에 자리한 연예인들도 많이 오는 술집을 알아냈으니 같이 가보자는 제안을 받고 들뜬 동시에 도대체 뭘 입고 가야 할지 덜컥 겁부터 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압구정 사람들’이 나를 보면 다른 동네 출신 뜨내기임을 눈치챌까봐, 그리고 속으로 ‘촌년’이라고 무시할까봐서였다. 결국 높은 통굽 구두를 차려신고 뻣뻣이 긴장한 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압구정동을 찾아갔던 날, 연예인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고 거리의 사람들도 그냥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뒤 10년이 훌쩍 넘게 흐른 지금도 내게 압구정은 어쩐지 주눅 드는 공간이고, 그 옆 청담동은 그보다 더 범접하기 어려운 동네다. ‘OO동’으로 통칭되는 세계에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계층에 속하거나 편입되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내가 스무살 이후 쭉 배워온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SBS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문근영), 어학연수도 유학도 못 다녀온 대신 독학으로 프랑스어 1급 자격증을 따고 각종 디자인 공모전에서 입상한 데다 디자인과를 차석 졸업했지만 간신히 의류회사의 1년 계약직에 꼴찌로 합격한 이 ‘동네 빵집 딸’의 부푼 희망에 문득 찬물을 끼얹고 싶어진 것도 그래서였다. “두고 봐! 나도 성공하고 청담동에 숍 내고, 그리고 여기서 살 거다!”라고 패기만만하게 외치는 세경을 향해 나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니 아비도 아니고 할아비 때부터 거기 살았어야지.”

물론 세경도 빠르게 현실에 부딪힌다. 사주의 딸이자 최연소 팀장인 상사는 세경을 향해 “후진 건 스펙이 아니라 안목”이라 단언하고, “유학을 안 다녀온 게 문제가 아니라 유학을 다녀올 수 없는 처지에선 그 정도 안목밖에 안 나오는 게 문제이며, 안목은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말한다. “노력이 나를 만든다”를 좌우명으로 살아온 세경은 “그 ‘처지’라는 건 우리 부모님이고, 부모님이 처지에 맞게 나한테 해주신 것들이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 어울려 온 친구들”이라며 억울해하지만 소용없다. 어머니의 병원비와 학자금 대출로 거액의 빚을 진 끝에 신용불량자에서 범죄자가 되어 한국을 떠난 옛 애인, 무리하게 아파트를 샀다가 하우스푸어가 된 가족, 대형마트에 치어 평생을 바친 빵집을 정리한 아버지 등 성실하게 살면서도 가난에 끝없이 발목 잡히는 이들의 모습은 세경의 현재이자 미래다.

그런데 여기서 세계 굴지의 명품 그룹 한국 지사 회장인 쟝띠엘샤, 차승조(박시후)가 등장한다. 원래부터 재벌 2세인 데다, 과거 세경의 동창이었던 윤주(소이현)와 결혼하기 위해 반대하는 아버지와 의절까지 했던 로맨티스트에, 결국 빈손에서 다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능력자이니 두루두루 ‘고(高) 스펙’을 갖춘 그는 세경의 순수함에 반한다. 그전에 세경이 이미 청담동 입성 작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리고 그를 가난한 비서로 알고 있을 때부터 좋아했던 세경은 간발의 차이로 ‘꽃뱀’ 혐의를 받으면서도 “회장인 거 알고 나서 더 좋아졌다”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실 <청담동 앨리스>는 흥미로웠던 주제에 비해, 대사와 설정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메시지에 비해 자주 삐걱대고 빈틈이 많은 드라마다. 클리셰를 피하려다 묘하게 과장되어버린 로맨스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갈등 구조는 차승조의 원맨쇼나 몇몇 인상적인 캐릭터로도 커버하기 힘들다. 전복적인 캔디, 신데렐라 상을 보여주려던 세경의 캐릭터 역시 종잡을 수 없다. 다만 이 드라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 대개 외면하고 넘어가는 구조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최근 세습사회로서의 대한민국에 대한 <한겨레21> 기사의 첫 문장, “재벌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재벌 2세는 아무나 되지 못한다”에 오래도록 눈이 멈췄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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