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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까다로운) 노력
김혜리 2013-02-15

▲스위스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공>(Le Ballon,1899). 때로는 붉은 점 하나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 해일에 아들을 잃은 <더 임파서블>의 헨리(이완 맥그리거)에게 마지막으로 본 아이가 갖고 놀던 빨간 공이 그랬듯이.

*1월8일 일기에 <더 헌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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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 피신 몰리토 파텔(수라즈 샤르마)의 취미는 우표 수집이 아니라 종교 수집이다. 어린 파이는 힌두의 신 크리슈나의 입속에 들어 있었다는 우주의 형상을 상상하며 황홀해하고,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외동아들을 보내 죽게 했다는 신약성서의 이야기가 말도 안된다고 반응하면서도 매료된다. 소년은 한 종교의 신에게 다른 신을 소개해주어 고맙다고 기도까지 한다. 말하자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신자가 된다는 일의 의미는 아무개 신을 만물을 창조하고 관장하는 유일한 절대자로 섬기는 행위라기보다 그 종교가 지닌 서사와 의례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파이는 “나는 신의 아들이 좋아졌다”고 독백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신은 인간이 창조한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호랑이의 눈동자에서 읽히는 인격은 네 생각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말할 때 파이는 도리질친다. 거기엔 신이건 무엇이건 인간 바깥의 숭고한 의지가 개입돼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쨌거나, 리안 감독은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종교를 미학적 활동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서 현세의 삶을 부축하는 종교의 기능을 발견한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태평양 표류 장면에서 자주 한몸이 되는 바다와 하늘처럼.

이 태도는 알랭 드 보통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취한 입장을 환기시킨다. 드 보통은 근대 이후 종교가 서구사회의 기둥과 대들보 자리에서 밀려난 지 오래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번민에 대한 체계적인 충고와 영감의 원천이 필요하므로 예술과 문학이 종교의 소임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6월 소설 <사랑의 기초> 발간에 즈음해 진행한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 중 알랭 드 보통은 예술의 종교적 기능과 관련된 질문에 유난히 긴 답을 보내왔더랬다. 지면 사정으로 다 싣지 못했던 대목을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다음, 문득 꺼내 읽어보았다. “소설과 역사의 내러티브는 능숙하게 도덕적 가르침과 교화를 줄 수 있습니다. 위대한 회화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철학은 우리의 고민을 유용하게 규명하고 위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종교가 주는 윤리적 교훈의 등가물은 문화적 규범들 속에 흩뿌려져 있습니다. 바로 내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중략) 우리는 좀더 종교적으로 세속문화에 접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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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저들은,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골고다의 예수가 하늘을 향해 속삭였던 이 말은, 아동 성추행 혐의로 마녀사냥감이 된 <더 헌트>의 유치원 교사 루카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끌로 깎아낸 것 같은 배우 매즈 미켈슨의 여윈 얼굴은 십자고상 위의 ‘그분’과 상당히 닮았다.) 친절한 선생님에게 호감을 품었던 꼬마 소녀가 뽀뽀를 거절당하고 상심하여 꾸며낸 거짓말이 온 산을 불태우는 형국이다. 가해자가 저지른 일의 무게는커녕 스스로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기에 <더 헌트>의 비극은 자연재해에 비할 만하다. 이것을 가공할 인재(人災)로 비화시키는 원흉은 집단 히스테리다. 아이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루카스 선생님네 지하실에 갔던 괴담을 부모에게 털어놓고, 의분에 찬 어른들은 사적인 응징을 가한다. 그러고는 이제 와선 긴가민가하는 최초 고발자 소녀에게 거꾸로 어른들이 정말 그 일은 일어난 거라고 주입함으로써 이 촌극의 고리가 완결된다. 애써 냉정을 유지하던 루카스가 폭발하는 것은, 차별에 순응하는 자신이 이 거짓 시나리오의 상연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몸도 마음도 피투성이가 된 루카스가 동네 슈퍼마켓과 일요일 예배가 열리는 교회- 가장 평온하고 예의바른 공공장소- 에서 일으키는 소요는 <더 헌트>가 포착하려는 메슥거림의 정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진짜 카운터펀치는 그다음이다. 오해가 잦아든 뒤, 연례 사냥 축제가 벌어진 날 숲에 들어선 루카스는 익명의 총구에 겨냥당한 사슴의 자리에서 불현듯, 위험은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공포는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이 아니라 아주 간단히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된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작은 벌레들을 밟을까봐 패닉에 빠지는 아이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루카스는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으려는 강박을 가진 꼬마에게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일러준다. <더 헌트>는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교훈을 속삭인다. 타인을 해치지만 않고 살고 싶다는 목표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라 까다로운 노력과 주의를 요하는 과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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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리처>는 즐길 만한 오락영화다. 더 제크(베르너 헤어초크)의 수하들이 잭 리처(톰 크루즈)를 기습해 벌어지는 욕실 격투 신은, “어이쿠, 어이쿠” 가슴을 졸이는 동시에 실소를 터뜨리게 한다. 좁은 공간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악당들이 반쯤 자멸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방이 인물을 때려눕히고 있는 것 같아 유쾌해지고 만다. 잠재적으로 시리즈화가 예정된 <잭 리처>에서 제일 아쉬운 대목은 역설적이게도 최고의 셀링 포인트인 캐스팅이다. 주역 톰 크루즈는 장점이 많은 배우인 데다가 존경할 만한 규율로 자기를 관리하고 작업하는 영화인이지만, 안개 속에서 스르르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고 어딘지 모를 다음 행선지로 떠나버리는 잭 리처 특유의 허깨비 같은 속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뜨거움, 달콤함, 교활함, 자상함, 서투름, 광기, 고지식함. 톰 크루즈는 수많은 자질을 훌륭히 구현할 수 있는 연기자지만 비밀스러움만큼은 목록에 포함하기 어려워 보인다. 잭 리처는 처음부터 몇 조각이 분실된 지그소퍼즐 같은 영웅이다. 어쩌면 마지막까지도 메워지지 않을 그 결락에서 잭 리처 시리즈를 밀어가는 동력의 큰 부분이 나온다. 원작은 원작일 뿐이라고 휘파람 한번 불고 잊어버릴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캐스팅.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필모그래피로 이루어진 진짜배기 카리스마를 가진 그는 더 제크 역에 제격이다. 평범한 말도 서사시 낭송처럼 들리게 하는 음색 자체도 천연 음향 효과다. (본인의 다큐멘터리 <잊혀진 꿈의 동굴>에서 헤어초크 감독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힐 때면 벽화가 그려진 3만2천년 전부터 그 동굴에 살고 있던 사람 같다.) 하지만 투덜이인 나는 더 제크의 분장이 또 불만이다. 음험함과 괴인(怪人)다운 비범한 기운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잭 리처>의 특수분장팀은 더 제크의 한쪽 눈에 유리 의안을 끼웠지만, 이 전형적인 악역용 액세서리는 오히려 헤어초크가 본래 품고 있는 기괴함을 덮어 동유럽 억양을 구사하는 흔한 할리우드 악당 보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시나리오가 캐릭터를 확실히 그려내고 옳은 캐스팅을 했다면 고정관념에 입각한 설명조의 분장과 의상은 사족이 된다. 물론,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리스베트나 <불량공주 모모코>의 모모코처럼 자기 정체성을 옷 차려입기로 표현하는 인물은 예외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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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으로 치면 <클라우드 아틀라스>만 한 서커스는 향후 10년쯤은 보기 어려우리라. 21세기 들어 다중배역 종목의 기록은 (역시) 톰 행크스가 일찍이 1인6역으로 과로한 <폴라 익스프레스>가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릿수부터 압도적이다. 십수명의 주조연이 여섯 이야기에서 일인다역으로 분하는 광경을 앙상블이라는 ‘평이한’ 단어로 칭하려니 조금 미안할 지경이다. 그럼 매스게임이라고 해야 할까. 모두가 성(gender)과 성격을 바삐 갈아입는 와중에도 윤회의 사슬을 초월해 악역으로 일관하는 휴고 위빙의 특이한 위치를 보면 <클라우드 아틀라스>라는 매스게임의 부제는 ‘휴고를 조심해!’라고 붙이면 좋겠다. 엇, 그러고보니 <매트릭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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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임파서블>의 장남 루카스

“엄마, 난 용감한 애인데 무서워.” 가족 여행길에 쓰나미에 휩쓸린 소년 루카스(톰 홀랜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최선을 다해 용감해진다. <허공에의 질주>의 대니(리버 피닉스), <윈터스 본>의 리(제니퍼 로렌스) 이래 가장 섬세하게 그려진 영화 속 맏이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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