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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쿼터가 위험하다
2002-02-01

한-미투자협정 체결 앞두고 스크린쿼터 축소 논의, 영화계 강하게 반발

스크린쿼터를 위협하는 망언이 흘러나와 또다시 영화인들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정부가 올해 상반기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계획하고 있고, 최근 이를 위해 “최소 106일로 정해놓은 현행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축소하겠다”는 발언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1월22일 “한-미투자협정 체결과 관련, 스크린쿼터 축소를 포함한 대부분의 쟁점이 합의됐거나 절충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관계자 역시 “폐지는 어렵더라도 2년 전 문화관광부가 제안하고 미국쪽이 동의했던 연 73일을 최저선으로 논의가 이뤄지지 않겠나”라고 밝혔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이같은 태도에 영화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이사장 문성근)를 비롯해 영화인회의,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한국영화감독협회 등 8개 영화단체들은 1월23일 “재정경제부는 문화주권을 팔아먹는 굴욕적인 한미투자협정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내고 “영상문화를 투자협정의 흥정 대상으로 삼으려는 일부 경제관료들의 시도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또한 1월28일에는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임권택 감독을 위시한 영화인들과 함께 ‘망언발언 규탄 및 대국민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정부를 강하게 압박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98년과 99년에 영화계가 정부를 상대로 벌였던 전면적인 스크린쿼터 수호 투쟁이 재연될 것이라는 예측 또한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쿼터 축소하면 통상협정 체결된다?

몇몇 경제각료들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언이 이처럼 영화인들의 ‘분노’를 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일단 다음달 19일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일정이 잡혀있는 데다 이에 앞서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올해 상반기 내에 이견을 좁혀 한-미투자협정을 체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황에서, 연이어 스크린쿼터 축소론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같은 발언이 이어진 것에 대해 여론의 비난이 높아지자 현재 재정경제부는 공식입장을 낸 적이 없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통상협정이라는 것이 쿼터를 축소한다고 해서 쉽게 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사견을 전제로 “여론이 그렇지 않은데 밀어붙일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이같은 경제부처의 움직임이 일련의 ‘짜여진 시나리오’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영화인회의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등은 재정경제부가 통상협정의 주무부서가 아닌데도 조속한 투자협정 체결을 위해서 스크린쿼터의 단계적 축소가 필요하다는 비공식 견해를 내놓은 것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1월23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들은 “정부가 추진중인 일련의 투자협정이 그동안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고의로 말을 흘려 떠보려는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외교통상부의 경우 지난 98년과 99년 한덕수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스크린쿼터제가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방해하고 있다”며 “스크린쿼터를 폐지하겠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매번 스크린쿼터 현행유지를 위한 국회의 결의안 체결로 인해 두 차례나 제동이 걸려 부담을 느꼈던 만큼 이번에는 재정경제부가 총대를 멘 것 아니냐는 것이다.

지난 1월17일 재정경제부가 영화인들을 불러 열었던, 쿼터 관련 비공식 회담 또한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당시 자리에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 배급개선위원회, 서울시극장협회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했으나, 이 자리에서 극장쪽 관계자들은 논의와 상관없이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하지 않는 한 한국영화의 부율조정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이에 재경부는 “스크린쿼터제를 반대하는 영화인들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이날 모임에 대해 “한-미통상협정 테이블이 마련된 지 2년이 지난 만큼 쿼터에 대한 영화계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 자리를 마련했다”면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쿼터에 대한)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영화 제작사와 투자·배급사들이 외화와 동등한 부금비율을 요구하자 극장쪽이 난데없이 쿼터제 폐지를 들고 나선 것을 역이용했다는 비판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미투자협정의 실효성 자체에 대한 의문제기

정작 통상업무의 주무부처인 외교통상부는 이같은 상황을 회피하는 눈치다. 북미통상국의 한 관계자는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외교통상부의 입장을 밝혀달라는 질문에 “그 문제는 문화관광부 소관”이라는 답변만을 반복했다. 지난 1월23일 미 무역대표부(USTR) 실무자들과 한미 통상현안 점검회의를 가졌던 고위 관계자 역시 “관계기관과의 협의가 끝나지 않은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도 갖고 있지 않다. 구체적인 안이 나온 뒤에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부 등과 공식적인 협의를 진행한 바 없고, 쿼터 축소에 대해서 그 어떤 책임질 말도 미국쪽에 먼저 건넨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1월25일 한 일간지에 실린 미 무역대표부 헌츠먼 부대표의 발언은 다르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로부터 다음달쯤 스크린쿼터제를 일부 개정하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한국 정부가 이같은 안을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크린쿼터 현행유지론을 견지해온 책임부서인 문화부와의 아무런 논의없이 일방적으로 비공식 견해를 전했다는 것은 현 경제부처의 오판 수준이 심각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여론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일 수 있다는 영화인들의 의구심을 뛰어넘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인들이 이전과 달리 스크린쿼터를 지켜내는 것뿐만 아니라 한-미투자협정의 실효성 자체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계 8개 단체들은 공동 성명서에서 정부가 체결을 서두르려고 하는 쌍무투자협정(BIT)은 최근 아르헨티나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종국에는 경제주권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외자유치라는 명목상의 목표는 사실 미국을 위시한 초국적 자본에 무대를 내주는 불평등 조약에 다름 아니며, 그러한 외자유치가 경제발전으로 이어진 사례 또한 없다는 것이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나라들 중 미국과 투자협정을 맺은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은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의 양기환 사무처장은 “뉴라운드 협상을 앞두고 시청각 서비스 분야를 포함한 각 분야에서 세계 각국이 좀더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갖추기 위해 애쓰는 마당에, 굳이 나서서 그것도 쿼터를 희생시켜가며 불리한 쌍무투자협정을 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경제논리가 아니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2002년, 국민들은 거리에서 이미 보았던 영화인들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것보다 출범 당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현 정부의 명확한, 그리고 폭넓은 현실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자초한 위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이는 지난 5년 동안 국민의 정부가 영화를 비롯한 영상산업에 쏟은 애정의 순도에 대한 평가와 직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영진 anti@hani.co.kr▶ 스크린 쿼터가 위험하다

▶ 한-미투자협정 체결합의 뒤 쿼터를 둘러싼 한 · 미 정부의 입장 및 발언

▶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5인의 진실 혹은 대담 (1)

▶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5인의 진실 혹은 대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