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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자, 이제 창조적인 작업물을 보여줘

KBS <광고천재 이태백>을 보다 드라마 속 직업인의 묘사에 대해 생각하다

<광고천재 이태백>

예전 잡지사 선배가 SBS 드라마 <토마토>의 구두 디자인 대결에 관해 격분하는 걸 듣고 ‘오오, 그렇구나’ 뒤늦게 깨친 일이 있다. 첼리스트의 무대용 구두를 두 회사가 각각 제작한 뒤 어느 쪽 구두가 선택받는지 가리는 미션에서 악녀 세라(김지영)는 진짜 루비가 달린 샌들 형식의 구두를, 주인공 한이(김희선)는 평범한 검은색 통굽 구두를 제작한다. 처음엔 세라의 것을 골랐던 첼리스트는 신어보니 편하다는 이유로 일본 무대에선 통굽 구두를 신겠다고 통보한다. 이를 두고 선배는 여성이 구두에 두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라고 혹평했었다. 더불어 창의적인 직업인에 대한 묘사가 부실한 드라마까지도.

KBS 드라마 <광고천재 이태백>을 보다가 선배의 말이 떠올라 <토마토>를 ‘다시 보기’했더니 과연! 문제의 구두는 무대의상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검정색 효도신발처럼 생겼더라. 화려함과 고급을 추구하는 악녀가 착한 주인공에게 허를 찔리는 반전을 만드느라 앉아서 연주하는 여성 첼리스트에게 효도신발을 선택하게 하는 무리수를 낳은 것이다. 크리에이티브를 중시하는 직업이 드라마에 등장하면 높은 확률로 창의력 대결이 펼쳐진다. 또한 등장인물들이 내놓는 작업물을 선과 악의 대결로 치환하는 드라마들은 딱 봐도 별로인 결과물에 ‘진심’을 담아 극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표현을 쓴다.

대학 중퇴에 50번도 넘게 광고회사에 낙방하고 간판가게에서 일하던 이태백(진구). 그리고 광고대행사 금산애드의 유학파 광고인 애디 강(조현재)의 라이벌 구도로 출발한 <광고천재 이태백>의 경우는 어떨까? 우선 인물간의 관계가 갑을 관계로 짜인 광고계의 생태계 안에 있으니 적어도 착한 광고인이 나쁜 광고인을 이기는 식의 저차원적 창의력 배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잠시 이 드라마의 갑을 관계를 살펴보자. 태백이 일하던 간판가게는 옛 애인 고아리(한채영)가 AE로 일하는 금산애드의 하청을 받았고, 전형적인 악녀처럼 보이던 고아리 역시 광고주의 비위를 맞추는 을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커리어를 쌓아간다. 애디 강의 아버지는 가족도 돌보지 않고 꾸준히 일해 금산애드의 대표가 되었으나 월급사장일 뿐. 갑에는 더 높은 갑이, 을에는 더 낮은 을이 촘촘히 엮여 있다.

일개 간판가게 직원인 태백이 갑인 아리에게 ‘3개월짜리 어음’을 현금으로 융통해줄 것을 부탁한다는 명목으로 금산이 추진하는 자동차 광고 아이디어를 아리에게 넘겨주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처음엔 ‘저놈은 밸도 없나!’ 싶었는데, 나도 조금은 빛나는 부분이 있다고 내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인정욕구. 그게 속내였다. 그리고 아리는 태백을 향해 외친다. “내가 노력한 만큼 너도 노력했어야지. 내가 이만큼 올 동안 넌 뭐한 거야!” 노력이라. 창조적인 면을 갈고닦아 인정을 받으려는 태백의 노력, 그리고 광고주와 광고사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그것을 자부심으로 삼는 아리의 노력. 그리고 술 접대 등 창조적인 일에 방해가 되는 비효율을 걷어내려는 애디 강의 노력까지. 이들의 모습에는 자기 방식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아집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렇게 조금씩 꼬여 있는 성품들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자들의 공통된 면 아니던가.

자, 남은 건 이들의 작업물이다. 4회까지 보여진 것들 대개가 메시지를 이미지로 함축하거나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실제 광고인 이제석의 작업들인데, 때로는 완성품으로 때로는 아이디어 단계로 분리되어 드라마 속 광고인들에게 나눠진 형태다. 이래서야 이제석을 분리해 서로 대결하거나 돕는 형국이다. ‘이것 봐, 내가 당신에게 훅을 날렸어’라는 자의식이 두드러지는 공익광고가 도시를 뒤덮을 때의 뜨악함은 ‘서울을 빛낸 영웅들’ 시리즈에서 경험한 바 있으니 기왕이면 좀더 다양한 스타일의 광고를 볼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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