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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없이’ 살 수 있어요?

KBS <인간의 조건>을 보며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다

나에게도 마침내 그날이 왔다. 세면대 앞 걸레 빤 물통에 휴대폰이 수직낙하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 물에서 건져낸 휴대폰은 켜진 채였고, 그 상태로 포털 앱을 열어 검색을 시작했다. ‘휴대전화 물에 빠졌을 때’는 자동완성 검색어였다. 절대 전원을 켜지 말고 수리센터로 가져가라는 정석적 조언과 함께 ‘드라이어로 말리기, 쌀자루에 넣어두기’ 같은 초동 대처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곧바로 트위터 앱을 켜서 사태를 보고했다. “일단 분해해서 말리세요”부터 “TV 뒤에 하룻밤 두는 게 최고입니다” 같은 신기한 솔루션까지, 5분 만에 십수개의 조언이 쏟아졌다. 결국 티슈로 물기를 제거하고 드라이어로 대충 말린 뒤 쌀통 깊숙이 휴대전화를 파묻어두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휴대폰이 없는 밤은 어쩐지 낯설고 불안했다. 눈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캄캄한 방에 누운 채로 게임, 트위터, 웹서핑을 하는 데 중독된 탓이었다. 지난해 겨울 KBS <인간의 조건> ‘휴대폰, 인터넷, TV 없이 살기’를 보며 역시 남의 일인 양 재미있어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신년에 폰 침수라니!(feat. tvN <푸른거탑>의 최종훈 병장)

이렇게 갑자기 닥칠 줄은 몰랐지만, 가끔씩 뭔가 ‘없이’ 산다는 것에 대해 상상한다. 전기, 가스, 수도, 교통, 통신 등 삶의 기반이 모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편리함을 빼앗긴다면 어떻게 될까. 엘리베이터가 모두 멈춘다면 초고층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은, 전화가 끊긴다면 그 많은 커플들은, TV와 인터넷이 사라진다면 당장 내 직업은? <인간의 조건>은 막연하게만 상상했던 이 ‘불편한’ 삶의 방식을 박성호, 김준호, 정태호, 허경환, 김준현, 양상국 등 여섯 개그맨들이 1주일간 합숙하며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현대 문명의 이기들을 감해봄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고민한다는 기획 의도가 자칫 공익과 교훈 강박에 짓눌려 어정쩡한 결과물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이벤트를 줄이고 일상에 집중한 프로그램은 자연스럽고 부담없이 재미를 유발한다.

휴대폰을 압수당하자 남의 휴대폰 케이스를 빌려 게임 흉내를 내고 종이를 찢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무의식중의 불안을 해소하던 출연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휴대폰 없이도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구체적으로 잡고, 가족과의 통화 한번에 감격한다. TV와 인터넷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양상국이 48시간을 꼬박 매달려 건담 프라모델을 완성하고, 김준현이 숙소에서 기타를 치며 <전화카드 한 장>을 부르는 순간은 주말 예능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즐겁다. KBS <개그콘서트>의 양대 산맥 격인 박성호와 김준호가 극과 극의 성격 때문에 묘한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서로의 재능을 인정하는 흥미로운 구도를 비롯해 ‘정여사’ 정태호가 알고 보면 다정다감하고 손재주가 많은 새신랑이라든지 ‘꽃거지’ 허경환이 어머니의 병문안을 가서 주위 사람들까지 살갑게 챙기는 아들이라든지 하는 무대 밖 그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요즘 두 번째 체험 프로젝트인 ‘쓰레기 없이 살기’를 진행 중인 여섯 남자들은 매일 자신이 배출한 쓰레기를 그대로 숙소로 들여와 무게를 재고 배출량이 가장 많은 멤버에게 벌칙을 내린다. 세탁소의 비닐 커버와 일회용 도시락 용기, 손을 떼는 순간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잔반, 무의식중에 수북이 쌓이는 티슈와 종이컵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코믹한 해프닝인 동시에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찌른다. 무겁다며 찬장에 처박아둔 텀블러와 사무실 커피머신 옆의 종이컵 더미를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무엇보다 주문한 음식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려 애쓰다 보니 봄맞이 다이어트 계획은 어째 점점 멀어져만 간다. 인간답게 산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