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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정]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은 영화
이후경(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3-03-22

<베를린> 제작한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

평일 오전 11시, 어머니들이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 보낸 뒤 겨우 숨을 돌리는 시간에 영화사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가 인터뷰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류승완 감독과 어느덧 세 아이의 부모로 살고 있는 그녀이지만, 28살의 그녀가 3살 연하의 감독지망생과 결혼했을 때 그녀의 40대에 광명이 비치리라 예상한 것은 옆집의 점쟁이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라며 버텼던 그녀가 이제 ‘우리 그냥 영화하게 해주세요’라는 말조차 무색할 충무로의 중견 제작자가 되어 있다. <베를린>의 성공이 알려주듯 명실상부 내조의 여왕이자 외조의 여왕으로서 류승완 감독만의 색깔을 지켜온 그녀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에게도 새로운 도약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 그녀를 만나 그동안 그녀가 류승완 감독과 함께 ‘피도 눈물도 없이’ 달려온 20년을 훑어보았다.

-늦었지만 <베를린> 700만 관객 돌파를 축하한다. =감사하다.

-500만명 넘을 때까지는 노심초사했겠다. =후반작업하는 동안에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더라. 손익분기점이 400만명 넘어가는 영화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감독이 하고 싶은 것과 상업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한 것 같다. 반은 류(승완) 감독이 잘한 거고 나머지 반은 네 배우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제작자 아내와 감독 남편 사이에 더 긴장감이 맴돌진 않았나. =기본적으로 류 감독은 프로듀싱도 되는 감독이다. 예산과 스케줄에 대한 감각이 아주 발달해 있어서 그런 부분은 걱정 안 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면 여성 관객도 배려해야 하기에 CJ 투자팀과 회의 중에 <쉬리>를 레퍼런스로 던졌다가 류 감독이 폭발한 적이 있지. 자기 레퍼런스는 <영웅본색> <첩혈쌍웅>인데. 그날 제작자가 감독에 대한 존중심이 있네 없네 하며 한판 붙었다. (웃음)

-보통 기획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류 감독과 다른 레퍼런스를 찾아보는 편인가. =이번만 그랬다. 200만명 미만이 손익분기점일 때는 보통 ‘엣지’있는 류 감독의 취향대로 밀고 간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니까. 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해 고, 스톱만 이야기해주는 편이다.

-결과적으로는 부부 이야기나 멜로라인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류승완 감독의 첫 영화가 됐다. 류 감독에게 한 첫피드백은 뭐였나. =(북한말 억양으로) 남조선 여자는 이케 안 살아. 남한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부부 이야기보다 북한에 대한 판타지에 가까웠다.

-캐스팅에도 많이 관여한 편인가. =전지현씨는 내가 마지막까지 설득했다. “이 패키지에서는 전지현이라는 화룡점정이 필요해.” 그것과 15세 관람가. 옆에 지나갈 때마다 15세 노래를 불렀다.

-제작자로서 인물들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관객이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됐을 텐데. =슬쩍 지나가는 말로, ‘앞에 유리와 아심 설명하는 부분은 내가 봐도 헷갈린다. 자막 처리를 해야 하나?’라고 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자막을 넣었더라. 실제로는 지저분하다고 자막 넣는 것을 싫어하거든. 류 감독과 충돌하더라도 필요한 부분은 오히려 굉장히 우회적이고 개인적으로 이야기한다. 가족끼리는 맘에 상처가 남을 수 있으니까.

-그럴 땐 류 감독도 쉽게 욕심을 버려주나. =류 감독이 PD 마인드가 있다는 거지 PD는 아니다. (웃음) 찍고 싶은 그림이 있어도 거래를 할 줄 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번엔 류 감독이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을 섭외해달라고 했다. 알아보니 상업적으로 공개를 안 해줘 톰 크루즈도 못 찍은 곳이더라. 그런 상황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지금은 류승완 감독 정도는 가볍게(!) 다루는 제작자지만, 대학 시절에는 영화는 안중에도 없는 강성 운동권 학생 이었다고. =당시 고대에 ‘돌빛’이란 영화 동아리가 있었는데 굉장히 싫어했다. 데모할 때마다 카메라 들고 왔다갔다 하는데 어찌나 거치적거리는지. (웃음) 그러다 졸업하고 몇달 뒤 충무로를 지나다 독립영화 워크숍 전단지를 봤다. 영화과를 나오지 않아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말에 끌리더라. 류 감독은 2기수 위였는데, 영화에 대해 아는 게 많기에 가까이 뒀지.

-김영진 영화평론가를 찾아갔다가 독설만 듣고 ‘두고 보자’ 했던 게 그즈음이었나. =그때도 10년째 시나리오만 돌리던 차세대 주역이 천지였다. 그래서 우리도 10년만 해보고 안되면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코아아트홀에서 영화 전단 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이후 주필호 대표님이 있던 ‘영화방’에 들어가서 외화 홍보를 하게 됐다.

-그러다 <투캅스3> 때 시네마서비스에 들어가 1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김미희 이사가 격하게 반대했다고. =청첩장을 드렸더니 따로 부르셔서는, 잠깐 쪽 팔리면 되니까 식장에 들어가지 말라셨다. 난 “왜 이러세요~”라며 웃었지. 부모님조차 한푼도 안 도와주셨으니까. 근데 난 또 나중에 엄마가 들어준 보험을 몰래 깨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대주고 그랬다.

-나중에 김미희 대표의 ‘좋은영화’사로 옮겨 변영주 감독의 <밀애>에 제작부 막내로 들어가게 된다. 경력이나 나이로 볼 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대표님이 프로듀서를 할 거라면 현장을 알아야 한다며 용기를 주셨다. 물론 힘들었지. 현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우며 득도의 시간을 보냈지. 현장에서 3km 떨어진 곳에서 막 양팔을 흔들며 차량 통제하고 있으면 왜 거기서 춤추고 있냐는 소리도 듣고. 또 촬영이 끝나면 나에게 밥을 먹인 다음에 아이스박스 2개에 필름 캔을 30개씩 담아줬다. 그걸 들고 혼자 심야버스를 타러가며 혼잣말도, 욕도 많이 했다. 그때 영화가 사람의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거란 사실을 정확히 배웠다.

-이어 <발레교습소> 제작실장 일까지 마친 뒤 독립 제작사를 차렸다. =<발레교습소> 끝나고 셋째를 임신했다. 애를 셋이나 달고 누구 밑에서 일하는 건 민폐라는 생각에 회사를 나왔다. 막상 독립해서도 아이들 때문에 남편이나 스탭들에게 충분히 신경 써주지 못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난 아이들을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게 다른 부부 영화인들과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외유내강’이라는 이름도 그때 만들었나. =연애할 때부터 ‘바깥사람은 류, 안사람은 강, 외유내강. 어우, 이름 죽인다. 네가 최씨면 우리는 최강필름이야’라고 하면서 놀았다.

-외유내강 간판을 내걸고 제작에 매진한 게 <짝패>부터다. 어떤 도전이었나. =‘내가 잘할 수 있어요’가 아니라 ‘내가 할게요’라고 손드는 일이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두홍, 류승완이 주연이었는데 누가 선뜻 나서겠나. 더 늦기 전에 이런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류 감독의 마음도 이해됐고. 그렇다고 류 감독이 내가 없으면 100 할 걸 80 할 사람은 아니다. 내가 있어서 120 할 수는 있어도.

-그 20은 뭘까. =내 편이라는 믿음이겠지. 내가 망하면 너도 망하는 운명공동체니까.

-<짝패>에 반해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무(모)한 도전이었지. 직원들도 월급이 밀린 상태로 내보내고, 밀린 월세 때문에 보증금도 한푼 못 건지고 나왔다. 류 감독이 다시 영화를 못 찍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이후 옮긴 암사동 사무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고. =(설)경구 형이 와보고 그러더라. “오오, 너네 회사 진짜 파이팅 있다!” 벽도 합판 대어놓은 거라 옆에서 류 감독이 인터뷰하면 나는 전화도 못 받고 쥐죽은 듯 있어야 한다. 그래도 거기 가고 나서 일이 잘 풀렸다. 이제 옮길 수도 없다. (웃음)

-<부당거래>는 류 감독이 처음으로 다른 작가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다른 제작사와 공동제작한 영화였다. 그런 작품도 해봐야겠다는 내적 필요가 있었나. =나는 시나리오를 어렵게 느낀 반면 류 감독은 쉽게 그림이 그려졌던 모양이다. 한재덕 PD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 가장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감독 하나다. 나머지는 잘 따라가면 된다. 제작자는 책임만 잘 지면 되고.

-당신에게 책임진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류 감독한테 종종 그런다. 내가 쇠고랑 차면 네가 사식 넣어줘야 한다고. (웃음)

-<해결사>는 반대로 류 감독의 시나리오로 신인을 입봉시킨 경우다. 작업 방식에도 변화를 꾀했나. =별로. 감독이 하고 싶은 것 하는 게 기본이다. 물론 제 밑에 현장을 믿고 맡길 수 있는 PD도 있어야 하지만.

-같이 일해온 PD, 마케터들도 말하길 “저는 잘 모르니까” 라고 하면서 재량권을 최대한 보호해주는 스타일이라더라. =아니다. 여기까지 온 건, 손자손녀들을 많이 봐주신 친정엄마, 알아서 잘하는 감독, 제작자가 할 일의 많은 부분을 안아야 했음에도 자기에게 재량권을 줬다고 말해주는 PD들의 삼박자가 맞았기 때문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겠지만 서두르지 않을 거다. 40대가 되니까 50보, 100보가 비슷하더라.

-<베를린>이 만들어준 여유인가. =<베를린> 이후 자신감이 많이 붙은 건 사실이다. 교만이 아니라 한 번 치열하게 덤벼보고 나니 못할 게 없어졌다.

-앞으로 외유내강의 필모그래피를 어떻게 꾸려갈지에 대한 걱정도 있겠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제작자라는 명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앞에 붙는 형용사가 중요하니까.

-어떤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가 되고 싶나.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사회적 역할을 믿는다. 결혼 안 해본 사람이나 아이 안 낳아본 사람은 잘 모르는 여자 이야기, 나만 할 수 있는 여자 이야기를 해볼 때가 곧 올 거다. 종종 류 감독 보고 내가 자기보다 유명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 근거없는 큰소리를 치는데, 그런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다. 10년 뒤에 그 아줌마 어디 갔어, 할 수도 있겠지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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