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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호르몬그래피
신형철 2013-04-17

<스토커>를 떠받치는 근본 은유를 찾아서

박찬욱의 영화를 열 수 있는 열쇳말 중 하나는 ‘부조리’(absurdity)일 것이다. 신선한 개념은 아니다. 1940년대의 철학자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프레임-개념으로 이를 세공했고, 이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1950년대의 몇몇 연극인들이 당혹스러운 공연을 올리기 시작했으며, 마틴 에슬린의 기념비적 저서 <부조리극>(The Theatre of the Absurd, 1961)이 경과를 정리하고 이름을 붙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부조리한’(absurd)이라는 형용사는 특정한 서사 혹은 비(非)서사의 일면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동원되기 시작했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이 오래된 개념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보여준다는 말과 세계를 부조리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말은 거의 같은 말이다. 그는 남과 북,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가해자와 피해자, 정상과 광기, 성과 속 등을 앞에 놓고, 거기서 부조리를 발견하거나 창조해냈다. 박찬욱의 영화를 이렇게 읽는 관점도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닐 테지만, 오랫동안 궁금했으나 볼 수 없었던 단편영화 <심판>(Judgement, 1999)을 최근에 보고나서는, 역시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박찬욱을 부조리의 관찰자이자 창조자라고 명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래 이 세계가 특별히 긴장하지 않으면 짓고 마는 표정이 조리가 아니라 부조리인데, 부조리를 다루지 않는 예술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더 세분해야 한다. 부조리 앞에서 예술가가 택하는 반응은 다를 수 있다. 부조리의 그 어처구니없음과 어찌할 수 없음 앞에서, 어떤 예술가는 울고 다른 예술가는 웃는다. 그들은, 지상의 부조리를 지켜보면서 ‘우는 천사’와 ‘웃는 악마’가 서로 다른 만큼, 다르다. 나는 천사의 편도 악마의 편도 아니다. 천사의 울음과 악마의 웃음을 모두 무능한 신에 대한 항의로 간주할 수 있다면 이 둘은 대등하게 옳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정직하기를 원하는 예술가들이 택할 수 있는 두개의 다른 태도일 것이다. 거의 비교되지 않는 감독들이지만,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깔려 있는 억제된 비탄이 전자에 가깝다면, 박찬욱의 영화가 보여주는 기괴한 유머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웃고 있을 때도 사실은 울고 있고, 후자는 울고 있을 때도 사실은 웃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인 <스토커>(2013)에서는 부조리를 향한 악마의 웃음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이 영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첫째, 이건 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가. 둘째, 박찬욱의 영화가 한번도 미풍양속의 함양을 위해 만들어진 적이 없기는 하지만,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의 비도덕성에는 논리가 결여돼 있지 않은가. 예컨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십대 소녀는 세명의 남자를 살해하는데, 자신을 강간하려 한 동급생과 엄마를 죽이려 한 삼촌은 그렇다 쳐도, 애꿎은 보안관은 왜 죽인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흰 꽃에 피가 튀어 붉은 꽃이 되는 저 멋진 장면을 위해 보안관은 죽을 필요가 있다는 식이 아닌가. 이 죽음은 이 부조리한 세계의 어처구니없음과 어찌할 수 없음의 산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영화를 여러 차례 다시 보면서 내 생각은 달라졌는데 바로 그것을 적어보려 한다. 첫째,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확실히 단순하지만 그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둘째, 비도덕성에 대해서는, 일단 이렇게 말해두자. 사실은 나도 보안관을 죽여본 적이 있다.

레이디 햄릿과 피의 데미안

내가 언제 어떻게 보안관을 죽였는지 말하기 전에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녀가 보안관을 죽이기까지의 여정을 먼저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불확실한 이유로 아빠가 죽는다. 그와 동시에 최소 18년 동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모녀 앞에 나타난다. 찰리를 대하는 모녀의 태도는 엇갈린다.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에게 찰리는 젊은 시절의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청년이어서 적당히 기분 좋은 성적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반갑고 고마운 손님이다. 그러나 인디아에게 삼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의 빈자리를 꿰차고 들어와 바야흐로 엄마를 유혹할 예정인 수상한 이방인이다. 적중한 것은 인디아의 예감이었다. 찰리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두 여자(오랫동안 이 집안의 가사를 총괄해온 맥개릭 부인과 오랜만에 인디아를 찾은 진 고모할머니)가 잇달아 실종되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것은 주인공의 성별이 바뀐 <햄릿>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딸은 아빠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고 낯선 사내로부터 엄마를 지켜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찰리가 자신의 욕망의 진짜 대상이 인디아임을 드러내면서부터다. 인디아에게는 자신의 범죄 사실조차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그녀를 미래의 공범자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반부에 이르면 찰리의 노력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그 효력은 두 가지 층위에서, 즉 성욕과 공격성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찰리의 은밀한 유도 덕분에 인디아가 그간 억압해온 자신의 성욕과 공격성을 자각하고 또 발산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지분대는 남학생을 연필로 찌를 때(공격성), 또 상호 애무에 가까운 피아노 합주의 환각을 경험할 때(성욕), 인디아의 곁에는 늘 찰리가 있었다. (찰리가 처음 등장할 무렵 인디아의 다리에 올라탄 거미는 이 대목쯤에 이르러 인디아의 성기 근처까지 온다. 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앞의 두 장면을 합친 것처럼 보이는 숲속에서의 살인 장면은 성욕과 공격성의 현란한 종합이다. 찰리와 인디아가 협력하여 윕을 죽일 때 그들의 ‘살인’은 ‘섹스’처럼 보인다. 이후 나오는 인디아의 자위 장면은, (관객에게는) 그 직전의 살인의 의미를 확정할 수 있게 하고 (인디아에게는) 섹스의 여운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의례다.

그녀는 이제 어른-여자가 되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인디아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엄마에게 다가가는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녀가 엄마를 딸로서가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또 그 자리에서 그녀가 아빠와의 사냥을 회상하며 그 사냥의 의미(‘나쁜 짓을 해봐야 더 나쁜 짓을 안 할 수 있다’)를 뒤늦게 깨달을 때 그녀는 아빠가 미리 보내놓은 편지를 이제 어른이 되어서 받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렇게 부모를 이해하는 순간이 바로 그들로부터 독립하는 순간이다. 인디아에게는 이 ‘독립의 밤’이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이후 아빠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나서도 결정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찰리와 함께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은 그녀가 결정적인 변화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결국 찰리를 저격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아빠나 엄마를 위한 분노와 헌신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한 일에 가깝다. 찰리 덕분에 아빠와 엄마를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찰리에게서도 떠나겠다는 것이 이 저격의 본질이다.

결과론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찰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디아를 위해서 정신병원을 나와야 했던 것이다. 성년이 된 인디아에게서 성욕과 공격성을 이끌어내는 존재, 그를 통해 소녀 인디아가 성인 인디아를 만날 수 있게 도와주는 매개자, 그 역할을 끝내고는 처단되어 사라지는 캐릭터. 찰리는 마치 인디아의 내적 요구 때문에 그녀 내부로부터 밖으로 떨어져 나온 존재처럼 보일 지경이다. 둘 사이의 결정적인 공통점(시청각 감각의 과도한 발달과 신체 접촉에 대한 혐오), 그리고 둘은 모르는 둘의 공통점(인디아와 어린 시절의 찰리가 함께 행한 날갯짓), 그리고 한 가지 의문점(찰리는 인디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신병원에 수감됐는데 인디아와 자신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녀에 대한 애착을 18년 동안 키워왔던 것일까) 등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스토커(Stoker) 가문에 흐르는 불길한 피 때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이 영화 자신도 그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레이디 햄릿은 피의 데미안을 만난 덕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또 되어야 할 것이 된다.

인디아는 자신이 어떤 어른이 될지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그 어른은, 찰리가 유도하기는 했으나 인디아 안에 이미 있었던 존재였을 것이다. 나는 랭보가 그녀와 비슷한 나이(1871년, 17살)에 쓴 편지를 떠올린다. 그 편지에서 랭보는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기괴한 영혼”을 만들어 “미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짐한다. “왜냐하면 나는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놋쇠가 깨어났더니 호른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내 안에는 다른 사람이 있다, 감각의 착란을 통해 그를 불러낼 수 있다, 시는 바로 그가 쓰는 것이다, 라고 랭보는 적었다. [랭보는 1인칭 주어에 3인칭 동사를 써서 ‘나는 타자다’(Je est un autre)라고 적었다. 영어로는 ‘I is another’(Martin Sorrell판 <랭보선집>) 혹은 ‘I is someone else’ (Wyatt Mason판 <랭보전집>)로 옮겨진다.]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감각의 착란’이 인디아가 자신이 ‘타자’임을 인식하는 과정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인디아가 랭보의 편지를 읽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녀가 깨어났더니 살인자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리비도의 시(詩)와 은유로서의 살인

요컨대 이 영화는 스릴러(whodunit story)의 외양을 갖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성장담(coming-of-age story)에 가깝다. 오프닝 내레이션과 클로징 주제가가 영화의 양끝에서 그렇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고, 박찬욱 감독 자신도 인터뷰에서 그렇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이 영화 전체가 성장통을 겪는 중인 한 소녀의 ‘비전’(vision)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까. (나는 지금 ‘비전’이라는 단어를, 1800년대 전반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이 사용했던 의미와 유사하게, 환각과 계시가 뒤엉킨 광경을 뜻하는 말로 쓴다.) 이 영화는 십대 후반의 소녀가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좁은 세계를 재료로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망상이라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생각보다 시시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그 시시한 사건이 갖는 의미와 강도는 지금 이 영화가 보여준 것에 버금가는 것이었으리라. 유년기의 아동이 가족을 대상으로 지어내는 이야기를 ‘패밀리 로망스’(프로이트)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십대 소녀가 쓴 ‘패밀리 스릴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대 소녀가 성인들의 세계로 건너가면서 겪게 되는 그 ‘감각적’ 충격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현란한 시청각적 연출은 그저 기량의 과시라기보다는 인디아의 내면풍경을 구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전략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는 (문학의 기준을 적용하자면) 서사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라고 해야 할 표현에 몰두한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시는 일단 아날로지(analogy, 유사성 놀이)의 기술이다. 이 영화의 교차편집은 정보전달의 효율성이 아니라 순수한 아날로지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인디아가 낮에 학교에서 한 녀석의 손가락을 연필로 찌르고 돌아와서 피 묻은 연필을 깎는다. 이때 필통의 뚜껑, 맥개릭 부인의 시체가 묻혀 있는 지하 냉장고의 문, 그리고 곧이어 찰리와 함께 연주하게 될 피아노의 덮개가 교차된다. 단지 뚜껑이라는 ‘형태의 유사성’ 때문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여기에는 어떤 ‘의미의 유사성’(찰리의 비밀과 인디아의 비밀이 ‘덮음’이라는 행위의 형태로 서로 교감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주목이 있다.

더 복잡한 경우도 있다. 인디아는 찰리와 함께 윕을 살해하고 시체를 땅에 묻은 뒤 샤워를 하며 자위를 한다. 그런데 이 대목은 이상하게 편집돼 있다. 찰리가 윕을 제압하고 인디아가 윕을 걷어찬다.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어쩐 일인지 진흙투성이가 된 인디아가 샤워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자위를 시작한 이후에야 윕이 살해되는 장면이 관객에게 뒤늦게 전달된다. 이 교차편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흥미롭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방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인디아가 인식하는 방식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그 뒤엉킨 시간의 논리를 따르는 편집이다. 성장의 한가운데 있는 소녀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의 의미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파악한다 해도 이성적 이해라기보다는 감각적 이해에 가까울 것이다. 인디아는 살인의 순간에는 그 일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사로잡은 흥분을 자위로 이어가고 나서야 자신이 어쩌면 방금 첫 경험과 유사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인디아의 관점을 통해 보도록 유도하기 위해 인디아를 사로잡고 있는 감각적 사실들을 영화적으로 재현한다. 이쯤에서 이 글의 도입부에서 제기한 두개의 비판 중 첫 번째 것에 답하자.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확실히 단순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판단은 이 영화를 ‘범죄 - 서사’로서 간주할 때나 유효할 뿐 ‘성장 - 시’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90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인디아가 쓰는 황홀한 ‘리비도의 시’를 읽었다. 이 영화의 목표는 애초에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두 번째 비판이 남았다. ‘리비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보안관 따위는 죽여도 그만인가?’ 서사는 자신이 일시적으로 설정한 명제를 단계적으로 배반하면서 전진하지만, 시는 단 하나의 은유를 변주하는 방식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바로 이 영화가 그렇다. 이 영화의 기초가 되는 은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영화의 비도덕성에 논리가 결여돼 있다는 주장에도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논리가 없다. 왜냐하면 은유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은유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우리는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났다.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 통과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죽여버리기도 한다. 지금 나의 내면에도 누군가의 벨트, 누군가의 블라우스, 누군가의 구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다. 잊지 않으면 그 미성숙의 시공간을 떠나올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인디아는 고향을 떠날 때 과속 운전으로 보안관을 유인해서 굳이 죽여야 했나. 기억을 봉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살인자이고 자발적 기억상실증자다. “꽃이 제 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인디아의 이 말은 언뜻 무책임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충고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는 문장이라면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불필요한 설명을 늘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오프닝 내레이션이 이미 ‘성장은 살인이다’로 정리될 이 영화의 근본 은유를 가장 정확하고 아름답게 풀이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내 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지. 사람들은 못 보는 작고 멀리 있는 것들이 내게는 보여. 이런 감각들은 일생 동안의 열망이 낳은 것이지. 구출되고 싶은 열망, 완전해지고 싶은 열망. 스커트가 펄럭이기 위해서 바람이 필요한 것처럼,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인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나는 아빠의 벨트를 맸고 엄마의 블라우스를 입었으며 삼촌이 준 구두를 신었지. 이게 나야. 꽃이 제 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이것을 깨달을 때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지.” 이 문장은 내가 ‘살인’이라고 요약한 성장 과정 전체를 ‘자각, 흡수, 탈출’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설명은 완전하다. 그러나 이 눈부시게 당당한 내레이션에서 내가 이상한 슬픔을 느끼고 마는 것은 내 살인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김행숙의 시 <호르몬그래피>(<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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