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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세상 끝에 홀로 버려진 나를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그들은 왜 사랑할 수밖에 없나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드라마 속 로맨스에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원체 감수성이 메마른 성정이기도 하거니와, 사람끼리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사랑에 빠지도록 캐릭터의 등을 떠미는 티가 나는 작품이면 아무리 절절한 로맨스가 펼쳐져도 멀뚱한 구경꾼이 되는 기분이다. 굳이 부모의 원수의 자식과, 또 굳이 어린 시절 잠시 스쳤던 그 아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주문에라도 걸린 듯 마주치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러브 미션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캐릭터들에게서는 연애의 설렘보다는 비장한 의무감이 먼저 느껴질 정도다. 예쁜 건 기본이라 쳐도 밝고 순수하거나 청순하거나, 하다못해 너무 열심히 살기라도 해서 단점을 찾기 힘든 여주인공들도 딴 세상 사람들만 같다.

그런데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장혜성(이보영)이 나타났다. 고등학생 때 엄마(김해숙)가 가정부로 일하던 판사 집 딸 서도연(이다희)의 한쪽 눈을 실명시킬 뻔했다는 누명을 쓴 뒤 퇴학까지 당해 인생이 단단히 꼬인, 하지만 비련의 여주인공에게 옵션처럼 따르는 신비롭고 처연한 분위기 따위는 그에게 없다. 어렵게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심드렁하고 의욕없는 변호로 일관하며 시간만 죽이다 “월 삼사백은 번다고 해서” 국선 전문 변호사를 지망한 혜성에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나’다. 불퉁한 의뢰인의 태도를 견디는 대신 무례하게 맞받아치고 자신이 불리할 때는 쉽게 얼굴을 바꿔 뻔뻔해지며 자신이 맞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떽떽거리는 혜성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만한 인간형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인격과 전형적인 여성성에 갇혀 박제되는 대신 마음껏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비딱한 성격을 드러내는 그는 진짜 사람 같아서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그래서 이 ‘별난’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신기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속없이 착하고 대책없는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동료 차관우(윤상현) 변호사는 눈치없는 태도로 첫 만남부터 혜성의 빈축을 사지만, 혜성은 이내 자신과 정반대로 너그럽고 배려심있는 차관우의 장점을 깨닫는다. 엄마를 제외하면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고등학생 시절의 사건 이후 깊이 상처받았던 혜성이, 남들 앞에서 장 변호사가 틀린 게 아니라며 옹호하는 차관우를 목격한 뒤 슬쩍 데이트를 신청하는 순간은 호감이 연애감정으로 피어나는 미묘한 순간을 흐뭇하게 포착한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한 뒤 사람의 눈을 보면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박수하(이종석)의 혜성에 대한 긴 짝사랑도 단지 삼각구도의 기계적인 축으로서만 작용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아버지를 죽인 민준국(정웅인)에 대한 자신의 증언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을 때 목숨을 걸고 증언해주었던 혜성을 향한 고마움과 그 뒤 의지할 사람 없이 외롭게 살아온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존재로서의 혜성에 대한 감동이 이 견고한 애정의 근원에 있다.

법정 드라마로서, 혹은 수사 과정에서 아쉬움이 종종 눈에 띄고 마침내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까지 등장했음에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놓기 힘든 건 그런 이유에서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운명의 장난을 헤쳐나가도록 만들기 전에, ‘왜 이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를 너무나 단단히 설득해놓았기 때문에.

+ α

초능력 소년 박수하에게 반하고 만 순간

폐지를 모아 팔다 먹고살기가 어려워 무가지를 훔치는 바람에 절도죄로 재판받던 차관우의 의뢰인 할아버지를 길에서 본 수하, 세개 2천원 하는 계란빵이 먹고 싶지만 단돈 500원뿐이라 망설이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자존심 강한 할아버지를 배려해 “혹시 500원 있으세요? 저한테 1500원밖에 없는데 계란빵 먹고 싶어서요. 합쳐서 사면 두개 드릴게요”라며 살갑게 말 붙이는 이 소년에게 반한 이유는 절대 외모가 아니다. 예쁜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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