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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재] “독립영화인들의 문제는 결국 사회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진행 김성훈 정리 정예찬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2013-07-26

한국독립영화협회 임창재 이사장

“창재 형이 작업할 때 우리한테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후배 독립영화인들에게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임창재(50) 이사장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공통적인 반응이다. 제작비와 일손이 부족한 까닭에 서로 도우면서 만드는 게 독립영화인데, 임창재 이사장은 후배들에게 손을 잘 내밀지 않아 다소 섭섭하다는 얘기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물질적으로 도움을 못 주니 정신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실험영화는 혼자서 작업이 가능한데 배우와 스탭이 필요한 극영화는 결국 후배들의 도움을 받으며 작업하게 되더라”고 대답했다. 그런 그를 두고 후배 독립영화인들은 “사람 좋은 형”이라고 말했다. 1998년 한독협이 창립된 이래 지금까지 15년 동안 독립영화와 함께 길을 걸어오고 있는 그는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독립영화유통지원센터(이하 지원센터) 건립준비 추진단 일을 하랴, 소셜펀딩 플랫폼 펀딩21과 업무 협약식을 맺으랴, 신작 <현수 이야기>의 마무리 작업을 하랴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최근 하고 있는 일이 많다. =한독협 일은 나보다 실무자들이 고생이 많다. 사무국원 3명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정신이 없다.

-지난 7월4일 서울영상미디어센터에서 지원센터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가 끝나면서 지원센터 건립에 관한 1차 작업은 완료됐다. 기본적으로 독립영화의 배급, 상영과 관련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독립영화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여러 방법으로 지원하자는 게 지원센터의 취지다.

-지원센터의 기능과 역할은 구체적으로 뭔가. =예나 지금이나 독립영화의 제작 편수는 많지만 상영 편수는 적다. 배급과 상영이 제작 편수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독립영화의 평균 관객수가 3천명 내외다. 일단 1만명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영관이 늘어나야 한다. 지원센터는 민간독립영화전용관과 서울 시내의 예술영화관 그리고 지방의 예술영화관을 아우를 수 있는 배급 라인을 확보할 계획이다.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간의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도록 할 것이다. 결국 감독과 제작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센터가 되었으면 한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공공자금을 지원받아 운영하겠지만 최대한 자율적인 민간기구로 전향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일종의 허브 같은 역할이다.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래에 있으면서 지원을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상호간의 협의를 통해 전망을 가지고 유연하게 대응하며 저변을 넓혀가는 것이 목표다. 내가 배급하는 작품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지원센터를 준비하던 중 인디플러스 문제(영진위가 직영하는 인디플러스 운영위원 4명이 영진위의 고용 불안정 문제에 반발해 집단 사퇴했다.-편집자)가 불거졌다. =단지 시기가 맞물렸을 뿐이다. 한독협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관점은 서로가 지속적으로 잘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영진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전반적인 문제라고 봐야 한다. 어쩌면 영진위에 당장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비겁할 수도 있다. 노동과 자본간의 문제로서 좀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 안에서는 지원센터의 운영주체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있다. =운영주체는 공모를 통해 한달 안에 결정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영진위가 부산에 내려가기 전까지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 공공적인 사업을 하는 지원센터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굴러갈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진위 직원도 포함될지 모르겠다. 현재는 기본적인 역할과 비전만 내놓은 단계다. 차후 운영방식과 실행계획에 대해 차차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컨소시엄이나 전문적인 포럼을 열어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근 한독협과 펀딩21이 소셜펀딩 공동사업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서로가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관객이 애정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영화들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결국엔 독립영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 제작자들도 펀딩 지원작에 선정됐을 때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운영을 해나가며 생기는 문제점은 그때그때 대처해나가면 될 것이다.

-CGV의 부율 조정안 발표식처럼 독립영화가 사안의 중심에 있는 자리가 아닌 경우에도 빠지지 않더라.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독립영화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엇보다, 독립영화에도 영화관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거고 관객을 만나야 하니 전혀 관련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와 대중영화가 서로 너무 거리를 두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가 많은 관에서 개봉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상업영화관과 비상업영화관으로 나누는 것은 기계적인 발상이다. 좋은 영화, 아름다운 영화, 의미있는 영화라면 적극적으로 일반상영관에서 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색한 자리일 텐데 불편하지는 않나. =솔직히 조금 뻘쭘하기는 하지만 매일 하는 일이 아니라 괜찮다. (웃음) 누군가는 그런 자리에 참석한 나를 잉여인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요즘엔 잉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잉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분야들이 많다. 독립영화가 가진 고유의 역할과 가치가 있다. 그런 자의식을 가지고 제작에 임해야 할 것이다.

-최근 독립영화가 시장에서 활기를 잃었다는 반응도 있다. =나무는 한달간 꽃을 피우기 위해 11개월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꽃봉오리만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나. 시기에 따라 힘들 때도 있지만 꾹 참고 견뎌낸다면 다양한 꽃만큼 다양한 독립영화가 만개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크게 눈에 띄는 작품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주목받는 한두편의 작품보다 다양성을 표현하는 영화들이 많은 게 좋다. 더불어 작품을 성과 위주로 판단하게 되면 상업영화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작품의 퀄리티와 흥행 여부는 별개로 판단해야 한다.

-지난 5월 신작 <현수 이야기>가 독립영화 쇼케이스를 통해 공개됐다. =오랜만의 작품활동은 아니다. 그동안 다른 작업을 많이 해왔던 것뿐이다. 장편 극영화 <현수 이야기>는 2011년 촬영을 시작했고 지난해 초에 편집까지 끝났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후반작업에서 많이 늦어지게 됐다. 현재 배급사 없이 개별적으로 극장과 협의해 개봉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배급사를 통하는 편이 편하지 않나. =맡기면 편하다. 그걸로 끝이다. 단지 여러 방식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배우와 스탭들이 헌신해서 만들었는데 무산되면 안된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고 고민하는 중이다. 내가 먼저 시도해본 뒤 작업 프로세스들에 대한 자료를 남기면 다양한 방식으로 배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의 노래>와 <현수 이야기> 사이에 실험영화 작업도 몇편 했다. =공식적인 자리 외에서는 나도 창작자다. 어떤 영화를 만들까를 항상 고민하고 있다. 실험영화의 경우 어느 정도 아이디어가 채워지고 실험하게 될 방법들에 대한 감을 잡으면 바로 진행해 만들고 있다. 미술관에서 설치개념으로 만든 작품도 있고 그동안 만든 작품으로 상영전을 열기도 했다.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관객과 만나는 데 흥미가 있다. 소품작업 혹은 실험영화는 그나마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작업을 통해 힘을 얻는다.

-<하얀방>(2002) 같은 상업영화를 다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나. =물론 상업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잘 살려서 관객에게 좋은 감흥과 정서를 줄 수 있는 작품도 하고 싶다. 이것은 돈의 가치를 떠나 누구나 가지고 있는 꿈 아닐까? 좋은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회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 (웃음) 상업영화, 독립영화를 떠나 창작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계속 작품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학부 시절에는 총학생회 간부였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성명서도 쓰고, ‘무언가’를 던질 일도 많았다. 너무 바빠서 영화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었다. 학생운동을 하며 4학년 때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회과학을 공부하느라 보지 못했던 예술 관련 도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영화 관련 도서도 많이 봤다.

-책으로 영화를 배운 셈이다. =그런 거지. (웃음) 실험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현대 미학에 관심이 많던 시절이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연스럽게 영화쪽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참 피곤한 매체다. 요즘은 그냥 산에 들어가서 그림 그리며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1998년 한독협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당시 독립영화가 처한 환경은 정말 열악했다. 다들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 자신의 다큐멘터리 <봉천동이야기>를 한 인천대생에게 건네주다 경찰에 연행됐다. 그때 영화인들 사이에서 단합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독립영화인의 울타리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체계적인 논의가 시작되면서 한독협이 1998년 9월18일 창립된 것이다. 되돌아보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15년 동안 한독협을 이끌고 있다. =사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이끌었다기보다는 ‘함께 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힘들지만 할 만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가 합리적으로 나오지 않아 대응조차 할 수 없어 오랫동안 ‘멘붕’ 상태다. 납득이 돼야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허공에다 대고 싸우는 듯한 양상이다. 한독협을 떠나 다들 개별작업을 하고 있는 게 독립영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깨어 있어야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서 독립영화계는 아직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어 괜찮다.

-언제가 가장 힘든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은 적은 없다. 한독협에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영향력이 큰 조직도 아니고. 그 와중에 앞에 나서서 발언을 해야 하는 상황들이 부담스러웠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괴리감도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좁혀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항상 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해왔다. 미디액트나 민간독립영화전용관 설립도 우리쪽에서 제기하고 설득해서 만든 것이다. 바라는 대로 다 이뤄지지 않아 지치기도 하지만 이제는 멈출 수가 없다. 누군가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

-현재 독립영화에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어렵게 작업하는 독립영화인들의 의지가 꺾이지 않고 창작을 계속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창작자와 예술가라면 모두가 고민하는 부분일 것이다. 최소한의 보장이라는 것도 없을뿐더러 국가에서 복지를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잖나. 먹고사는 일상적인 고민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독립영화인들의 문제는 결국 사회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이 바로 한독협이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다. 한독협은 울타리가 없는 초원이 되어 그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아까 얘기한 대로 산에 들어가서 그림 그리며 살아도 될 텐데 오랫동안 한독협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뭔가. =대표직을 맡으면서 말이 많이 없어졌다. 듣는 사람이 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스스로는 예스맨이 되어가고 있다. 무분별한 동의가 아니라 나의 주장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 아닌가. =이제 슬슬 산에 들어가도 될 것 같다. (웃음)

인터뷰를 진행한 장소는 홍대입구역 근처의 한 카페였다. 임창재 이사장이 사람을 만나 회의를 하거나 혼자서 작업하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이란다. 한독협 사무실이 있는 공덕동에는 들어가보지 않아도 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곳에는 개인 책상이 없다. 회의실에서 작업을 해도 되지만 후배들이 불편해할까봐….” 자신보다 동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그는 후배 독립영화인들의 말대로 “사람 좋은 형”, 아니 한국독립영화의 좋은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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