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틸다 스윈튼] 누가 여자래요?
김혜리 사진 최성열 2013-08-12

틸다 스윈튼

<설국열차> 제작진을 취재하러 모인 수많은 매체를 수용하기 위해 제작사가 한층을 통째로 인터뷰 룸으로 세내다시피한 호텔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다가 틸다 스윈튼이 킥 웃었다. “꼭 공항 보딩 게이트 같지 않아요? 저 문으로 들어가면 부산, 이 문으로 가면 서울로 날아가는 거예요.” 인터뷰 전날 입국한 틸다 스윈튼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설국열차>의 최종 편집본부터 시사했다. “크리스의 손에서도 커티스는 이미 흥미로운 인물이었지만 완성본을 보고나서야 <설국열차>가 리더십이라는 주제에 대해 얼마나 깊고 현대적이며 정치적인 탐구인지 알았어요.”

질서가 곧 생존이라고 또박또박 역설하는 <설국열차>의 메이슨 총리를 객석에서 바라보며, 나는 진보적 예술가로서 견해를 숨긴 적 없는 현실의 틸다 스윈튼이 메이슨의 논지를 말끝마다 반박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실없이 웃었다. 당신과 정반대인 여자를 연기하는 재미가 무엇이었냐고 묻자 그녀는 “누가 여자래요? 메이슨의 단발머리는 확실히 가발이고 다들 서(Sir.)라고 부르잖아요?”라며 찡긋한다. 성별의 경계 따위 지워버리는 이 배우의 마력은 <설국열차>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에게 메이슨의 캐릭터를 조각하는 과정은 정치 지도자들이 걸치는 가면을 디자인하는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엄청 과장된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메이슨이 머리를 시커멓게 염색한 히틀러나 카다피, 사담 후세인, 우리를 지금도 억압하고 있는 지도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실적인 인물임을 깨달았어요.” 그러면 영국 요크셔 악센트와 들창코를 메이슨의 특성으로 제안한 근거는 뭘까? “요크셔 억양의 사연은 사적인 거예요. 어린 시절 내가 권위란 이런 거다 경험한 특정 인물의 추억과 관련이 있죠. 아뇨, 전혀 혈연은 아녜요! ‘돼지코’는 늘 해보고 싶던 외양인데 (코를 누르며) 코가 이렇게 되면 즉각적으로 눈과 치아의 움직임에서도 어떤 성격이 나와요.”

한데 메이슨은 온갖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연약해 보이고 때로는 가련하다. 스윈튼은 끄덕였다. “메이슨이 ‘광대’라는 점은 우리에게 중요했어요. 대중은 메이슨처럼 허풍스럽고 미친 듯이 잔인한 정치 지도자들이 그래도 인간적이길 바란 나머지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경향이 있어요. 카다피나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이 표현한 히틀러나 조지 부시의 우스꽝스러운 발언이 대중의 농담거리가 되는 풍경에는 나를 직접 해치지 않는 지도자들에게서 뭔가 귀여운 점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충동이 들어 있어요. ‘귀엽다’는 봉 감독과 우리가 메이슨을 표현할 때 늘 쓰던 형용사였어요. 메이슨은 기차 시대 이전에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았고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맛본 권력이라고 상상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권력이 아니라 가짜인 거죠. 한편 메이슨이 생활하는 객실의 닫힌 문 뒤에서 일어나는 일도 우리의 놀잇감이었어요. 맞아요. 미스 마플처럼 뜨개질을 한다거나 벽에는 클리프 리처드나 저스틴 비버의 브로마이드를 붙여놓았다거나. (웃음)”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워낙 친숙했던 스윈튼은 <설국열차>를 포함한 봉준호 영화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2년 전 첫 만남에서 편안한 공감대로 작용했다고 기억했다. “나는 봉 감독의 급진적 관점뿐 아니라 논리적이면서도 로맨틱한 그의 비관주의를 사랑했어요.”

영화에서 내가 본 틸다 스윈튼은 신성과 인간성, 여성과 남성, 현실과 판타지를 가볍게 아우르는 특별한 육체와 정신의 예술가였다. 이 모든 묘사는 아름답지만 대단히 추상적이다. 그래서 직접 대면한 짧은 대화에서도 똑같은, 아니 상통하면서도 더 큰 감흥을 느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스윈튼은 모두를 배려하면서도 애쓰는 티가 보이지 않았고 차 한잔을 권하듯 자연스럽게 영감과 위안을 주었다. ‘완성된 인간, 해방된 인간’이라는 말이 설핏 머리를 스쳤다. 혹시나 싶은 욕심으로 못다 한 질문을 이메일로 보내면서 수신인의 이름 앞에 Mrs.나 Ms.를 어쩐지 붙일 수 없었다. 성별에 특화된 그 타이틀들은 이 희귀한 사람을 실체보다 앙상한 존재로 가둬버리는 부당한 제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틸다 스윈튼 인터뷰의 내용은 다음주 ‘영화의 일기’란에서 마저 소개됩니다.-편집자)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