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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드라마의 품격

<추적자 THE CHASER>보다 한발 더 나아간 <황금의 제국>

SBS 드라마 <황금의 제국>.

드라마의 품격이란 무엇일까. 고 김종학 감독을 추모하기 위해 최근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한 <모래시계>를 볼 때마다 이 질문을 떠올렸다. 사실 한동안 드라마와 ‘품격’이라는 단어를 함께 떠올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은 낯선 기분이 들기도 했다. 커다란 서사의 흐름 속에 각자의 당위를 잃지 않는 개인이 있고, 그들이 가장 자신다운 선택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딜레마가 이야기를 힘있게 이끌어나가는 드라마의 재미를 아주 오랜만에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행하는 장르와 소재가 반복되고, 창작보다 외국 드라마 리메이크가 선호되고, 수출을 위한 문화적 코드가 어색하게 이식되곤 하는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점점 만나기 힘든 결과물이라는 생각에 이내 씁쓸해졌다.

하지만 드물어졌다 해서 멸종한 것은 아니다. SBS <황금의 제국>은 여전히 이야기 고유의 힘으로 승부하는 드라마가 얼마나 강한 흡인력을 갖는지 보여준다. 명문대 법대에 다니던 가난한 집안의 착한 아들 장태주(고수)가,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얻은 가게가 재개발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이자 철거 용역에 맞서던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동산 사업가로 변신하는 과정은 흔한 ‘복수와 야망’ 스토리 같지만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시범단지를 건설하기 위해 무리하게 철거를 진행했던 성진건설, 그리고 그 모태인 성진그룹 창업주 일가의 경영권 싸움에서 장태주가 중요한 키를 쥐게 되면서 이야기의 스케일은 점점 거대해진다.

물론 재벌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많고, 재벌가의 후계구도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황금의 제국>에는 병든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은행장 딸과 정략결혼을 하는 최민재(손현주)의 선택이나, 죽은 전남편의 복수를 위해 임신한 채 최동성(박근형) 회장과 재혼한 뒤 27년 동안 본심을 감추고 칼을 갈아온 한정희(김미숙)의 음모처럼 ‘막장 드라마’적 요소도 있다. 그러나 가족간에도 뚜렷한 목적과 이득이 없으면 차 한잔 같이 마시지 않고,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식탁에서의 편이 다르게 갈릴 만큼 권모술수가 판치는 인간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은 이야기를 대하는 작가의 진지함 때문이다.

지난해 SBS <추적자 THE CHASER>로 충격을 안겼던 박경수 작가는 <황금의 제국>에서도 수많은 등장인물들에게 나름의 당위성과 매 순간 그들 각자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패를 선사한다. 우연한 목격, 어설픈 엿듣기, 무의미한 대화는 없다. 태주와 민재, 최서윤(이요원)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누가 봐도 멍청한 수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치열하게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빠진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예상치 못한 수를 써서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올 때의 쾌감은 배가 되며, 누구도 마음 편히 응원할 수 없는 딜레마의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토록 촘촘하게 짜인 이야기의 그물은 결국, 만드는 사람이 보는 사람을 만만하게 여기지 않고 매회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패를 꺼내놓으며 전력으로 부딪히는 데서 나오는 거라 생각한다. 작품의 품격이란 아마도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성진시멘트 주식이 있다면 누구를 밀어줄까

고 최동성 회장의 차녀이자 성진그룹 부회장 최서윤. 속없이 착하거나 민폐만 끼치거나 툭하면 울고불고하는 드라마 속 ‘영애’들과 달리 항상 냉정, 침착하고 머리회전이 빠르다는 점이 매력있다. 무엇보다 한정희와 최민재에게 회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장태주에게 결혼신청을 한 뒤 “콜을 하든지 다이를 하든지 선택하세요”라고 던지는 배짱에 무릎 꿇었다. 회사도 얻고 미남도 얻다니, 과연 진정한 승부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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