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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헤니] 나쁜 젠틀맨이라도 좋아
윤혜지 사진 백종헌 2013-09-05

대니얼 헤니

그때 그 ‘백마 탄 왕자님’이 다시 돌아온다. 백마 탄 왕자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 이 남자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지 않을까. 언제나 스위트한 미소가 걸려 있는 입꼬리, 한없이 든든해 보이는 어깨와 가슴,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보면 주저하지 않고 손부터 내밀 것 같은 신사적인 태도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운 이 남자, 대니얼 헤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니얼 헤니는 우리가 으레 기억하던 매너 좋고 선량한 왕자님이 아니다. <스파이>의 이중스파이 라이언 역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 대니얼 헤니에게선 어쩐지 위험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대학 시절엔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미국에서 모델 일을 하며 런웨이와 연극 무대를 오가던 대니얼 헤니는 CF를 찍던 중에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헨리 킴 역에 캐스팅되어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KBS 드라마 <봄의 왈츠>의 필립, 영화 <Mr. 로빈 꼬시기>의 로빈 헤이든을 차례로 거치며 그의 ‘백마 탄 왕자님’ 이미지는 견고하게 완성되어가는 듯했다. “헨리를 연기하기 전엔 헨리 같은 역을 맡아본 적이 없었는데 헨리를 연기하고 난 뒤 사람들은 나를 헨리와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대중이 자신에게 부여한 이미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대니얼 헤니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내가 얻은 이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실제로도 난 젠틀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항상 젠틀한 건 아니다. 배우로 살 수 있게 돼 무척 행운이라고 여기지만 때론 나의 사생활까지도 모두 연기인 것 같아 괴로울 때가 있었다. 모두가 사실은 그냥 나 자신인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입양아 애런 베이츠의 실화에 바탕한 <마이 파더>의 제임스 파커는 대니얼 헤니에게도, 대중에게도 전환점이었다. 환상과 로망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그에게 비로소 현실적인 존재감을 얻어낼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한국계 입양아인 제임스 파커 역에 영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대니얼 헤니만큼 적역인 배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실화라는 것과 실존 인물이 주는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대니얼 헤니를 짓눌렀다. “<마이 파더>를 할 때가 연기하며 가장 무서웠을 때다. 스스로 그만한 연기를 할 준비가 안돼 있다고 생각했다. 줄곧 도망치고 싶었고 두려웠다.” 하지만 대니얼 헤니는 애런 베이츠의 무게를 굳세게 견뎌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연습하던 육상선수가 모래주머니를 풀어내고 민첩해진 몸으로 본 경기를 치러낼 때와 같이, 제임스 파커를 털어내고 난 뒤에야 그는 가벼워질 수 있었다. “<마이 파더>는 나에게 아주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프로젝트다. 아직도 애런 베이츠와 연락하고 지낸다. 그의 가족과도 종종 만난다. 그때의 나에게 <마이 파더>가 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스스로를 믿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감없던 예전에 비하면 이젠 나를 좀 믿게 됐다.” 이때의 도약은 대니얼 헤니를 할리우드에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마이 파더>를 본 개빈 후드 감독이 그에게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에이전트 제로 역을 맡아달라고 러브콜을 보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의 물꼬를 튼 <엑스맨 탄생: 울버린> 이후 그는 국내외를 종횡무진했다. 미국의 TV시리즈 <스리 리버스>에선 외모도 능력도 출중한 외과 레지던트를 연기했고, KBS 드라마 <도망자 Plan.B>에선 로비의 중심에 선 국제적인 사업가로 분했다. 여전히 영어로 말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그는 “촬영 끝내고 다 같이 술 마시고 밥 먹는 한국의 현장이 항상 가족 같은 느낌이 있어 좋다”고 했지만, 자신의 선호와는 별개로 그에게 한국이라는 무대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해외 작품에서 그는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곤 했다. “코미디 작품에 목말랐을 때쯤 출연한” 중국과 미국의 로맨틱코미디 합작영화 <상하이 콜링>에선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 샘 역으로 첫 주연을 꿰차며 제15회 상하이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신인연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니얼 헤니가 스스로 “엄청난 팬”이라고 밝힌 김지운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에선 포레스트 휘태커를 보필하는 FBI 요원 필 헤이즈 역으로 출연했다. 지난 8월 중국에서 개봉한 로맨틱코미디 <일야경희>도 있다. 생일파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기억을 잃은 여자(판빙빙)가 그로 인해 매력적인 세 남자와 얽히게 되는 이야기인데, 대니얼 헤니는 그 세 남자 중 하나를 연기한다. 여러 캐릭터를 연기해보니 취향도 구체적으로 다듬어졌다. “본 시리즈나 007 시리즈 같은 프랜차이즈 첩보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처럼 액션과 휴머니즘이 결합한 작품에 출연할 수 있길 바란다. 한국 작품 중엔 <두사부일체>나 <조폭마누라> 시리즈가 비슷하지 않을까. 일하는 데선 프로페셔널한 동시에 연약하고 인간적인 캐릭터가 수많은 에피소드를 강하게 이끌어간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대니얼 헤니도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지 잘 안다. “<스파이>의 라이언은 ‘대니얼 헤니의 이미지’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라이언은 영희(문소리)를 유혹하기 위해 ‘가짜 젠틀맨’을 연기하는 ‘진짜 나쁜놈’이다.” <스파이>의 후반부에서 김철수(설경구)를 향해 악쓰듯 토해내는 라이언의 대사는 배우로서 자신이 가진 이미지의 양면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그의 진심처럼 들린다. “여긴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 그게 스파이의, 우리의 운명이야.” 이중스파이의 운명을 짊어지고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 파국을 맞은 라이언의 모습까진 아니지만, 대니얼 헤니 역시 끊임없이 자신의 할 일을 찾아 세계를 떠돈다는 점은 비슷하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서든 “언어의 장벽을 초월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배우로서 대니얼 헤니만이 가진 독보적인 장점이다. “십여년 전만 해도 할리우드는 할리우드, 한국은 한국, 홍콩은 홍콩으로 영역이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요즘엔 합작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 않나. 내가 상대적으로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엔 동의한다.” 이제 이중스파이가 되어 돌아온 이 남자를 보이는 대로 믿어버려선 곤란할 것 같다. 예의바르고 다정한 미소 뒤에 감춰진 그의 다른 눈빛을 보라. 앞으로 그가 보여줄 다채로운 면모 중에서 어떤 이미지로 그를 바라보게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magic hour

“Are you okay?”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우는 희진(정려원)을 달래며, <Mr. 로빈 꼬시기>에서 술에 취한 민준(엄정화)을 보며, <마이 파더>에서 싸우다 다친 요섭(김인권)과 아버지(김영철)를 향해, <스파이>에서 넘어질 뻔한 영희를 붙잡아주며 유혹의 미소를 날릴 때 대니얼 헤니가 부드러운 톤으로 건넸던 공통의 대사다. 상황과 캐릭터는 모두 달랐지만 괜찮냐는 한마디에 함축된 다정함은 어떤 것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 물론 그 대사가 ‘다정함을 함축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건 전적으로 우월한 그의 외모 덕택이다. “나도 나쁜 남자일 때가 있다”고 그는 고백했다. 하지만 대니얼 헤니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이 대사를 하든,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며 안부를 물어오는 그의 앞에서 녹아내리지 않을 여심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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