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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스코프] 없는 게 없는 할아버지의 리어카
주성철 사진 오계옥 2013-09-13

조재현 ‘감독’의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공식 트레일러 촬영현장

할아버지의 실제 부인인 천순덕(77) 할머니는 이북 원주 출신으로, 피난길을 나서며 3일만 지나면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뒤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할아버지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전부터 입버릇처럼 “영화제가 나를 인간 만들었다”고 말해온 조재현 감독의 마음속에는 결국 다큐멘터리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일부러 슬레이트를 치지 않았기에 할아버지는 ‘느닷없는’ 독백을 쏟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연기경험이 없었지만 주연으로 섭외된 이후부터 촬영을 위해 4일간 면도를 하지 않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조재현 감독의 말에 따르면 “트레일러 속 리어카야말로 세상의 모든 다큐멘터리 소재들이 다 담긴 할아버지만의 작은 우주”다. 한/중 청소년들이 독도를 방문한 기사가 실린 신문, 그리고 낡은 우유곽(일부러 남양유업 우유곽을 바닥에 박박 갈아 실었다) 등 감독이 직접 배치한 세상의 풍경이기도 하다.

“두번 만에 끝낸 거, 정말 잘하신 거예요. 이순재나 최불암 선생님도 대여섯번씩 해요.” 트레일러의 주인공 김성수 할아버지가 촬영을 한번 만에 끝내지 못해 너무 미안해하자, 조재현은 웃으면서 할아버지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이기도 한 조재현은 트레일러를 직접 연출하기로 결정하면서, 경기도 노인복지관에 부탁하여 올해 82살의 김성수 할아버지를 소개받았다. “수많은 어르신들의 프로필 사진을 보며 오직 ‘관상’만으로 선택했는데, 공교롭게도 영화 속 역할과 딱 맞게 실제 폐지를 주우며 생활하는 할아버지셨다”며 “평소에도 TV를 보지 않으시기에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셔서 더 마음에 들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렇게 배우 조재현이 감독으로 나섰다. 북에 고향을 둔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리어카의 책 속에서 DMZ영화제 초대장을 발견한다는 그 자신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현재 TV 주말드라마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은 드라마 촬영이 없는 지난 8월24일(토) 새벽 5시부터 오후 8시까지 충무로와 김포에서 이뤄졌다. 직접 감독으로 나선 이유가 제일 궁금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저 “제작비를 아껴야지!”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일일감독’ 이상으로 진지했다. 실제로 그는 성신여대 미디어영상연기과에서 ‘다큐멘터리와 연기’라는 강의를 맡고 있다.

할아버지가 끌고 다니는 리어카 안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조재현 감독의 말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다큐멘터리 소재들이 다 담긴’ 할아버지만의 작은 우주다. 그 리어카를 끌고 새벽부터 도시를 돌아다닌 할아버지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할머니가 오늘도 밖에 나와 철책 저 멀리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다. 저 멀리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본 할아버지가 예정에도 없던 대사를 무심코 내뱉는다. “에이구, 오늘도 또 나와 있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독백을 읊조리기 시작한다. 원래 촬영 분량에 없던 장면이다. “아까 할아버지와 점심을 함께 먹는데 갑자기 할머니 얘기를 하시며 우셨다. 실제로 북에서 피난을 온 할머니였는데, 젊어서 자기가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거다. 그래서 집에 계시는 할머니를 바로 섭외해서 마지막 장면을 바꿨다.” 조재현 감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진짜 다큐의 순간이 무척 흡족한 눈치다. 아마도 ‘연기’라는 느낌을 없애기 위해 촬영 내내 “딱! 딱!” 슬레이트도 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하루 종일 그 모습을 지켜본 결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김기덕 감독 스타일’처럼 느껴진다고 했더니 “촬영기간이 하루밖에 없는데도 나름 재빨리 유연하게 바꿨고 다행히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김기덕 감독과 오래 작업했으니 자연스레 닮는 것 아닐까. 급하게 바꾸고 대안을 찾고, 그런 상황이 그다지 낯설지 않다”며 웃었다. 작업이 흡족했던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한 뒤풀이 자리에서도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분량을 재편집해 단편영화제에 출품할 계획도 세웠다. 물론 오는 10월17일(목) 개막하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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