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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히들스턴] 낙천 바이러스
윤혜지 2013-11-05

톰 히들스턴

“열세살 때, 기구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열두명의 사람이 되어 기구를 타야 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토론 수업을 했었다. 나에겐 단지 열두번의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뿐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연기를 배워보지 않겠냐고 했고, 그 뒤론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었다.” 톰 히들스턴은 어린애 같은 특유의 웃음소리로 낄낄대며 말했다. 보통 때엔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그의 눈에서 이따금 번뜩이는 장난기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나 드래곤스쿨, 이튼스쿨, 케임브리지를 거치며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로열연극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톰 히들스턴은 의외로 나쁜 남자를 연기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인다. 마블 시리즈의 로키가 대표적이고, <섬들>(2010)의 냉소적인 아들 에드워드, <더 딥 블루 시>(2012)의 열정적이면서 차가운 공군 장교 프레디 역시도 그러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2주쯤 되었을까. 런던의 한 극장에 구겨져 영화를 보던 히들스턴은 매니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급히 조안나 호그를 만나러 간다. “티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이어서 미안했다는 히들스턴은 호그의 마음에 쏙 들었고, 그 모습 그대로 영화 데뷔작 <언릴레이티드>(2006)에 캐스팅된다. 그 무심한 차림이 삐딱한 소년 오클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호그와 히들스턴은 이후 <섬들>과 <엑시비션>(2013)까지 세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고전문학을 전공해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에 능통한 히들스턴이 신화에 끌린 것은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신들과 괴물이 등장하고, 철학과 비극이 뒤섞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대서사시가 난 정말 좋았다. 내가 거쳐온 것보다 더욱 넓고 깊은 삶들이 담긴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은 항상, 분명하게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토르: 천둥의 신>(2011)(이하 <토르>)에서 히들스턴은 북구 신화의 교활한 로키를 예민하고 음울한 셰익스피어풍의 예술가로 재창조했고 과연 그의 로키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끄는 데 성공한다. 어쩌면 이 매력적인 로키는 케네스 브래너의 애정어린 연출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BBC> 드라마 <월랜더>(2008)와 연극 <이바노프>(2008)를 함께하며 히들스턴은 케네스 브래너와 가까워졌다. 케네스 브래너와는 로열연극아카데미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그보다 앞서 히들스턴이 연극 무대에서 노닐던 시절, <오셀로>(2008)에서부터 히들스턴을 눈여겨본 브래너는 <토르>를 준비하며 미리 로키 역에 히들스턴을 점찍어뒀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른 채로 오디션에 참가한 히들스턴은 토르 역을 따내기 위해 호리호리한 몸을 잔뜩 불리기까지 했으나 호주 출신의 근육질 미남 크리스 헴스워스에게 간단히 밀리고 만다. 정확히 말하자면, 밀린 것이 아니라 오디션 자체가 로키 역에 내정된 히들스턴에게 어울릴 토르를 찾는 과정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어쨌든 계획대로 브래너는 히들스턴에게 로키를 제안했고, 히들스턴은 애써 부풀려놓은 근육들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에 돌입해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다.

이름이 알려지자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들도 차례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디 앨런은 히들스턴이 <토르>를 찍기 전부터 그가 출연한 연극을 보고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스콧 F. 피츠제럴드 역에 히들스턴을 캐스팅했다. 우디 앨런은 히들스턴에게 간단한 시나리오와 손편지를 보냈고, 히들스턴은 피츠제럴드가 되기 위한 준비로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물며 피츠제럴드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우연한 마주침은 히들스턴이 <토르>를 촬영하고 있을 때였다. 히들스턴은 그 자리에서 <워 호스>(2011)에 출연해달란 제의를 받았고, “어린 시절의 영웅이자, 배우가 되고자 결심하도록 만든 사람인” 스필버그의 제안에 그는 <워 호스>에서 의롭고 다정한 니콜스 대위로 분했다. “1차대전 당시의 시를 무척 좋아한다”는 히들스턴에겐 <워 호스>의 촬영이 “그 애틋한 시기를 살아볼 좋은 기회”였다. 히들스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연의 아름다움을 존중할 줄 아는” 시네아스트 테렌스 데이비스와의 작업은 의외이면서도 충분히 그럴듯한 만남이다. <더 딥 블루 시>에서 히들스턴은 “열정의 반대편엔 고통이 자리하고, 겉보기엔 활달하고 매력적이지만 그 내면은 잔혹하면서도 지독하게 외로운” 공군 장교 프레디를 맡아 상대배우 레이첼 바이스와 더할 나위 없이 스산하고 아름다운 로맨스를 만들어냈다. 이후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유명한 <어벤져스>(2012)로 히들스턴의 주가는 정상으로 치솟았다. “<아이언맨>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런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차려 보니 내가 아이언맨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있지 않았겠나!”라는 히들스턴의 농담이 이젠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의 언어나 다름없다”는 둥 “내 심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는 셰익스피어”라는 둥 히들스턴이 셰익스피어를 향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적은 한두번이 아니다. 그 마음이 닿은 듯 셰익스피어 역사극 4부작을 소재로 샘 멘데스가 제작한 <BBC> TV영화 <할로우 크라운>(2012)에서 히들스턴은 훗날 헨리 5세가 되는 할 왕자를 연기할 기회를 얻는다. 과연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로열연극아카데미 출신의 엘리트 배우답게 히들스턴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셰익스피어극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그는 즉석에서 대사를 바꿀 수 없는 셰익스피어극의 방대한 대사를 외우기 위해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히들스턴은 “런던의 한 공원에서 통화하는 척하며 공원을 계속 돌아다니는 미친놈이 있었다면, 그게 바로 나였을 것”이라는 말로 고된 연습과정을 재치있게 표현했다. 올해 칸에 출품된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에선 아담 역을 맡아 이브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과 연인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 이전을 그리워하는 시적인 뱀파이어”를 연기하기 위해 히들스턴은 “화를 유발할 정도로 낙천적인 자신의 본성을 최대한 억눌러야 했다”고 한다.

마블 시리즈를 향한 국내 관객의 애정을 방증하듯 곧 <토르: 다크 월드>가 전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개봉한다. 프로모션을 위해 내한한 히들스턴은 국내 팬들에게 정성스러운 팬서비스를 선물하고 ‘히들이’라는 애칭까지 얻어 돌아갔다. 아스가르드의 지하 감옥에 갇힌 로키가 이번만큼은 그토록 탐내던 오딘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까. 현재 그는 기예르모 델 토로가 연출할 고딕풍 호러 스릴러 <크림슨 픽>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하차한 자리를 꿰차고 대기 중이다. 대형 스튜디오 영화와 인디펜던트 작가영화를 자유로이 오가며 쉼 없이 연기혼을 불사르던 이 사랑스럽고 유쾌한 낙천주의자는 올겨울 일단 연극 무대로 돌아가 셰익스피어극 <코리올라누스>를 공연할 예정이다. 누군가 또다시 공원에서 통화하는 척 괴상한 대사를 읊어대는 히들스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를 보게 되더라도 완벽한 연습을 위해 부디 모르는 척 지나가주길.

<토르: 다크 월드>

magic hour

2인자 징크스?

이번에야말로 로키는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까. 요즘 가장 핫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톰 히들스턴이지만, 토르에 밀린 로키처럼 2인자의 자리에 서야 하는 때가 있었다. <워 호스> <토르: 천둥의 신> <미드나잇 인 파리>가 연이어 개봉하며 한창 주가를 올리기 시작한 2012년, 그는 <글래머> 선정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배우’ 리스트에서 로버트 패틴슨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어벤져스>로 전세계 마블 팬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뒤엔 <더 딥 블루 시> <할로우 크라운>을 통해 실제의 젠틀한 모습과는 상반된 위험한 매력이 있음을 보여줬으나 최근 <엠파이어>에서 리서치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배우’ 리스트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제치지 못하고 다시 2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에 히들스턴은 “내가 2위라니, 이유를 알 수 없다.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은 하나다. ‘늦었는데 어떡하지.’ 이 결과는 누나와 여동생이 날 놀려댈 좋은 핑곗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겸손한 소감을 밝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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