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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나는 너야” “아닐걸?”

미래에서 온 내가 나를 만나면, KBS 드라마 <미래의 선택>

KBS 드라마 <미래의 선택>.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붉은 노을>을 부르라 요구하고 부모까지 욕보이는 진상 고객을 응대하며 쌓이는 모멸감. 고객의 전화를 먼저 끊어선 안된다는 규칙 앞에서 홈전자 콜센터 계약직 상담원 나미래(윤은혜)는 무력하다. 모욕은 그저 눈물로 씻고 ‘괜찮다’고 자신을 달래고 견디는 수밖에.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방법도 모르고 나이도 많아서 막연한 동경만 품던 그녀는 오빠네 집에 얹혀살며 받는 무시와 구박에 ‘내가 시집을 가고 말지’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KBS 드라마 <미래의 선택>의 나미래를 보면서 ‘왜 그러고 사느냐’고 면박을 주거나 조언을 곁들이긴 쉽다. 하지만 인생의 분기점이 더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발치께에 등불을 드리우는 것만도 필사적인 그때는 팔 하나만큼 뻗어 어둠을 밝히는 일이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그런 나미래 앞에 25년 뒤의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불쑥 찾아와 말했다. “나는 너야.” 불행한 결혼을 되돌리려 타임머신을 타고 2013년에 도착한 쉰일곱살의 나미래(최명길)는 서른두살의 나미래를 다그친다. 회사에서 만들어주지도 않는 명함을 직접 파서 대기업 다닌다고 자랑해봤자 몇년 뒤 잘릴 테고, 백수가 되어 방구석에서 뒹굴다 결국 고독사한 노인이 된다 해도 지금처럼 행복하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는지. “너라면 훨씬 젊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왔는데 지금 보니 넌 나보다 훨씬 더 늙었다, 얘. 자신도 없고 가능성도 없고 뭉개고만 싶고. 오빠한테 짐만 될 텐데 뭐하러 사니? 넌 그냥 조용히 나가 죽어.” 25년 뒤의 그녀는 ‘나가 죽어’라는 말이 입에 밸 정도로 불행했나보다.

잠깐 생각해보자.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현명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 지금 이대로 늙어 불행해졌다는 미래의 내가 하는 인생코치를 순순히 따르거나 완전히 거부할 수 있을까? 글쎄. 타임머신까지 탔으면서 고작 다음해 7급 공무원 시험의 답안, 그것도 국어 답안만 간신히 외워 오신 쉰일곱살의 ‘큰 미래’ 여사님. 그리고 “내 말 안 들으면 앞으로 탈 수 있는 세탁기 등의 경품에 관해 말해주지 않겠다”라는 으름장에 솔깃하게 반응하는 나미래를 보면 장담은 못하겠다. 두 사람이 툭탁거리는 모습은 마치 돈과 결혼을 화제로 무방비하고 속된 수다를 떠는 평범한 모녀 같기도 하다. 한편, 미래는 엄마처럼 극성스럽게 잔소리를 하는 늙은 자신이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데다 행색이 초라하지 않고, 어쨌거나 결혼도 했다니 내심 안도한다. 큰 미래가 이 옷은 마트에 널렸고 25년 뒤의 세상에서 자신은 노안이라며 조바심쳐도, 바닥을 찍고 기운을 낸 나미래는 공무원 시험 준비 대신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에 도전한다. 등록을 거절당했던 학원 수업을 청강하고, ‘프리뷰’라는 용어조차 모르는 채로 방송국 막내작가가 되기 위해 덜컥 일을 받아든다.

이 과정에서 미래의 생각이나 행동 모두가 근사해 보이진 않는다. 두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연적에게 샘도 내며, 약은 꾀도 부려보는 그녀는 당위로 쌓은 도덕의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여주인공과도 다르다. 나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원래 특출한 구석이 있던 것도 아닌 그녀가 미래에서 온 자신을 만났다고 급작스럽게 레벨업하고 현명해질 리 없지 않나? 나미래는 앵커가 꽂아준 낙하산이란 빈정거림을 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제 깜냥 안에서 안간힘을 쓰며, 배타적이었던 팀원에게 작은 인정과 신뢰를 얻어낸다. 큰 미래는 ‘나는 너’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미래의 입장에선 비로소 나는 당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기점을 찾은 셈이다.

+ α

완벽한 사람은 없어

나미래뿐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딘가 한구석 모나고 못나고 모자란 면을 갖고 있듯, <미래의 선택>의 등장인물들 역시 그렇다. 원칙과 소신을 앞세우는 독불장군 아나운서 김신(이동건)은 같은 팀에서 민폐 소리를 듣고, 리포터 서유경(한채아)은 일을 따내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남자 PD들의 식사 수발을 든다. 이외에도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PD, 대규모 사고를 앞두고 제 가족의 안전부터 챙기는 작가 등 어리석거나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밉상, 꼴불견, 필요 없는 잉여 따위의 평가를 들을 법한 이들의 사정을 살피고 미래처럼 ‘괜찮다’고 견뎌내던 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작은 계기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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