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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스코프] 스물일곱번 만에 오케이
정지혜 사진 오계옥 2014-04-11

박정범 감독의 <산다> 촬영현장

수연과 하나가 아무도 없는 지하실에 번개탄을 피우고 나란히 누웠다. 깊은 단잠에라도 빠진 걸까. 미동조차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왠지 엄마와 딸이라기보다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앞으로도 영영 만날 것 같지 않은 두개의 평행선처럼 보인다.

“하나, 원을 두르듯이 방석들을 둔다.” 본 촬영에 들어가기 앞서 박정범 감독은 수연과 하나를 앞에 두고 촬영 컨셉에 대해 일일이 설명한다. 여러 개의 방석들로 자신이 누울 자리를 만드는 하나와 그런 하나를 멀뚱히 바라보는 수연이다.

비좁은 지하실에 배우와 스탭 10여명이 꽉 들어찼다. 레드 에픽 카메라를 메고 원 테이크로 모녀를 따라가는 김종선 촬영감독을 쫓아 스탭들도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커피콩을 볶아 번개탄 대용으로 쓰려고요.” 지상에서 아침부터 커피 원두 볶기로 씨름하던 스탭들의 노고 덕에 연기가 은근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어둑하고 음침한 지하실 위쪽 창으로 빛이 들어온다. 마을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뛰어노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린다. 엄마와 함께 쓰러져 있던 하나가 서서히 일어나 창가로 가더니 창문 너머를 말없이 바라본다.

수연(이승연)과 하나(신햇빛)는 벌써 몇 시간째 지하실로 내려가보지도 못하고 계단 앞에 서 있다. “어둠을 그렇게도 싫어했던 수연입니다. 근데 지금 너무 순순히 안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수연이 좀더 두려워하고 주저하기를 바라는 박정범 감독의 요구가 계속되더니 기어코 감독은 직접 연기 시범까지 해 보인다. 본인의 영화에서 연출뿐 아니라 주인공까지 도맡아온 흔치 않은 감독답게 배우의 연기를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그는 이번에도 수연의 남동생 정철로 영화에 출연한다. 아쉽게도 이날의 촬영분에는 그의 등장이 없었다. 대신 배우들의 연기를 조금이라도 달리 보이게 만들려는 감독 박정범이 버티고 서 있었다. “다시 가겠습니다”만 스물여섯번을 외친 끝에 마침내 스물일곱 번째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혀를 내두를 만한 지독함이다. “아, 사람 한번 죽기 힘들다.” 20kg 가까운 에픽 카메라를 몸에 매달고 몇 시간째 지하실에 있다가 겨우 지상으로 올라온 김종선 촬영감독의 한마디가 이 모든 상황을 함축한다.

3월30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의 한 공가옥에서 박정범 감독은 <무산일기> 이후 5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장편 <산다> 촬영을 진행 중이었다. <산다>는 공황장애 등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는 수연과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의 딸 하나, 수연의 남동생 정철과 그의 여자친구, 정철이 일하는 강원도의 된장공장 사장과 그의 딸이 얽히고설키는 이야기다. 이날 촬영분은 수연이 하나가 이끄는 대로 빈집의 지하실로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주인공 모녀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영화 전체로 봤을 때 상당히 중요한 신이라 감독, 배우, 스탭 모두 신경이 곤두선 상태다. 2월14일 크랭크인해 4월15일 크랭크업을 하기 위해서 모두 밤낮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리는 중이다. 휴식도 잠깐. 모녀는 마침내 지하실로 내려갔다. 이번엔 또 몇 테이크나 갈지 다들 초긴장 상태이다. 죽기 위해 번개탄을 피운 하나가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초코우유와 빵을 먹는 장면이다. “승연 선배, 하나에게 리액션을 주지 마세요. 눈도 마주치지 마세요.” “빵을 그냥 드세요!” 수연에 대한 감독의 요구가 끝없이 계속된다. 이미 정신의 병을 앓는 여자가 죽음 앞에 섰을 때 딸에 대한 연민보다는 그냥 맥을 놓고 직관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다는 게 감독의 판단인 것 같다. 이번에는 열다섯번을 가고 나서야 다들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연기, 매캐한 죽음의 냄새 속에서 과연 이들 모녀는 어떤 결말을 맞았을까.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 장편 지원작인 <산다>는 5월 전주에서 첫 상영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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