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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지적인 품위, 그리고 외설의 긴장

잉리드 툴린 Ingrid Thulin

<의식>

피카소의 예술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사실이 그의 여성 관계다. 피카소는 끝없이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딸 같은 여성과의 교제는 말할 것도 없고, 말년엔 손녀 수준의 여성(모델인 자클린 로크)과 결혼했다. 누군가에겐 부러움을, 또 누군가에겐 혐오감을 줄 수 있는 행보인데, 묘하게도 피카소는 새로운 여성을 만날 때마다 화풍의 변화 혹은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선보이곤 했다. 영화계의 피카소를 꼽자면 단연 잉마르 베리만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베리만의 여성 편력도 ‘염치없는’ 수준이다. 협연한 배우들은 거의 모두 연인이었다. 잉리드 툴린은 ‘베리만 사단’의 고정 배우였는데, 다른 여배우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 흥미로운 경우다.

‘베리만 사단’의 지성파 배우

‘베리만 사단’은 물론 공식적인 단체가 아니라, 그와 평생 인연을 맺은 동료들을 말한다. 베리만 사단에 포함되는 여배우들은 대개 한번쯤은 베리만의 연인이었다. 이 점이 많은 추문을 낳았는데, 주로 베리만이 그들을 발굴할 때 사랑도 싹트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모니카와의 여름>(1953)을 찍을 때는 하리에트 안데르손과, <한여름 밤의 미소>(1955)를 찍을 때는 비비 안데르손과 연인이었고, 또 오랜 기간 동거도 했다. 베리만은 물론(?) 기혼자였다.

‘베리만의 여성 배우 넷’을 꼽자면 만남의 순서대로, 하리에트 안데르손, 비비 안데르손, 잉리드 툴린, 그리고 리브 울만이다. 리브 울만과는 <페르소나>(1966)를 찍으며 연인이 됐고, 둘 사이에는 딸도 하나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네명 중 유일하게 ‘표면적’으로는 베리만과 아무런 일이 없었던 배우가 잉리드 툴린이다(베리만의 평소 행실로 볼 때 믿기는 좀 어렵긴 하다). 다른 배우들이 전부 베리만의 감성에 파문을 던졌다면, 툴린은 베리만의 머리에, 곧 이성에 어필한 경우다. 툴린의 매력은 우선 냉정한 이성에 있다. 그렇다고 툴린에게 에로티시즘이 없었느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차가운 이성의 매력 혹은 약간 남성적인 성적 모호성이 더욱 돋보였을 뿐이다.

평범한 배우였던 툴린은 베리만을 만나 스타로 발돋움한다. <산딸기>(1957)에서 주연과 다름없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뒤부터다. 시아버지(빅트로 시외스트롬)와 자동차 여행을 함께하는 며느리 역인데, 그녀는 반듯한 인상과 차분한 말투로,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받는 지식인 시아버지에 견줘 전혀 밀리지 않는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산딸기>로 툴린은 지성미와 품위를 남겼다.

중성적인 매력은 <마술사>(1958)를 통해 소개된다. 남편(막스 폰 시도)은 마술로 관객을 현혹시키는 배우이고, 그녀는 유랑극단의 남장배우로 나온다. 낮엔 몸이 약간 작은 과묵한 남자배우 행세를 하는데, 밤이면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매력적인 아내로 둔갑한다. 낮의 멜랑콜리한 분위기와는 너무 달라진 모습이라서 그런지 밤의 그녀는 요염한 여우, 그 이상으로 관능적이었다. 지적인 배우들이 대체로 그렇듯 툴린은 여기서 ‘과묵한 미소년’ 같은 이미지를 심는다. 1960년대 베리만의 전성기 시절의 걸작인 <침묵>(1963)에서 툴린의 지적이고 중성적인 이미지는 더욱 복잡해진다. 번역가인 툴린은 책에 파묻혀 활기를 잃고, 생명마저 곧 놓칠 것처럼 연약해 보인다. 바싹 감정이 마른 여성으로 보였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여동생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급기야 혼자 남은 호텔에서 자위까지 한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는, 질서 정연해 보이는 여성이 놀랍게도 성적 일탈을 연기하니 그런 반전도 없었다. 아무리 자유로운 스웨덴이라지만 <침묵>은 개봉 당시 외설 파문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툴린은 그런 과정에서 ‘불편한 연기’에 주저하지 않는 용감한 배우라는 미덕을 자신의 개성에 하나 더 추가했다.

외설의 긴장을 몰고 온 역할들

잉리드 툴린은 어부의 딸이다. 넉넉하게 자라지 못했지만, 배우가 되려고 상업고교를 다니며 자신이 번 돈으로 발레 교습을 받았다(매력적인 몸매는 발레 덕분일 테다). 연기도 독학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스톡홀름의 왕립드라마학교에 입학하면서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졸업 뒤에는 역시 왕립드라마극장에서 배우로 일했는데, 여기서 잉마르 베리만을 만난다. 1956년이었고, 당시 베리만은 유명 영화감독이자 지방인 말뫼극장의 연극감독이었다.

그의 영화경력에 베리만만큼 영향을 미친 남자가 남편인 해리 샤인이다. 샤인은 스웨덴 문화계의 유명인이었다. 언론인이었고, 영화비평가였으며, 문화계의 논쟁가였고, 나중엔 스웨덴영화협회(SFI)의 회장이 된다. 진보정치가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회장이 된 1963년, 영화법을 개정하여 제작사에 유흥세를 감면해주고 대신 수익의 10%를 협회에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협회는 그 자금으로 제작 지원을 했고, 베리만은 최대의 수혜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1960, 70년대 스웨덴영화의 부활은 그 법 덕분이라고들 말한다. 말하자면 툴린은 ‘베리만 사단’의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사회적 권력층의 한 부분으로 편입해 들어갔다. 베리만의 스캔들에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데는 이런 사회적 조건도 이유가 됐을 터다.

그렇다고 연기에까지 권위를 내세우는 일은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특히 40대에 접어들면 여배우들은 종종 이미지에 손상을 입는 역할은 피하려고 하는데, 툴린은 더욱 용감한 역할을 소화해냈다. 툴린은 <늑대의 시간>(1968)에서 지적이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한 여성으로 나온다. 그녀는 옛 애인(막스 폰 시도)을 나체로 유혹하고, 남자가 유혹에 넘어가자 곧바로 순진하다고 비웃는 탕녀를 연기한다. 그때 툴린은 42살이었는데, 전면노출의 악역 연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거의 상체를 드러내고 연기하는 <의식>(1969), 비스콘티를 만나 모자 사이의 근친상간을 역시 나체로 연기하는 <저주받은 자들>(1969), 그리고 위선적인 남편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 성기관을 자해하는 아내 역을 맡은 베리만 말년의 걸작인 <외침과 속삭임>(1972) 등에서 툴린의 연기는 늘 외설과 긴장된 위치에 있었다.

이런 외설과의 긴장이 베리만 사단의 다른 배우들과 비교할 때 돋보이는 대목이다. 베리만도 피카소처럼 새로운 여성들을 만나며 더욱 왕성한 활동을 선보였는데, 특히 통념을 무시하는 문제작들은 주로 잉리드 툴린과 찍었다. 그 작품들은 전부 사회와의 긴장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사회와의 긴장 관계가 예술의 주요한 덕목이고, 툴린은 그 덕목의 불편한 끈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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