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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탐구생활] 이달의 멋진 주(酒)신 : 술 빚는 고무정

고무정/ 23세,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일산 거주

그는 내가 아는 남대생 중 가장 전형적이지 않은 놈이다. 처음 고무정을 봤을 땐 그저 점잖은 샌님같다고 생각했다. 학기 초의 어느 날 그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차나… 한잔 할래요?”놀랍게도 이선균의 발성과 흡사했다. 그러나 실없는 이선균. 미묘하게 어색한 문어체 말투. 차나 한잔 하자는 그의 대사가 수작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조금 훗날의 일이다. 그는 정말로 차를 즐기는 놈이었다. 다도를 익힌 남자. 좋은 다기 세트를 가진 남자. 그걸 학교에 들고 오는 날엔 나는 평상에 앉아 그와 차를 마셨다. 평상은 고무정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는 멀쩡하게 생겼고 키도 컸지만 패션 센스는 미묘하게 어긋났다.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무엇을 입어도 어딘가 어색했다. 그러자 언제부턴가 고무정은 생활한복을 입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이거야말로 너를 위해 태어난 옷이야.”그의 생활한복 핏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어느 날 학교 벤치에 앉아 광합성을 하고 있는데옆에 앉은 고무정이 물었다.“브로콜리너마저 좋아해?”내가 대답했다.“중학교 때 자주 들었어.”그러자 그가 가방에서 천천히 무언가를 꺼냈다. 단소였다. 나는 외쳤다.“중임무황태!”그것이 내가 단소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고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소를 조심스레 입에 가져가더니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노래를 - 너에게 - 주고 싶어-’ 응?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였다. 단소에서 흘러나오는 <보편적인 노래>는 참으로 기이하게 들렸다.

그는 또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Time to say good bye~’이번엔 세라 브라이트먼의 노래였다. 단소가 그토록 현란한 악기인지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캠퍼스에서 생활한복을 입고 단소를 부는 그는 점잖았지만 이상했다. 방학이 되자 그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 개강하는 날에 양손에 여러개의 술병을 든 채 등장했다. 갑자기 웬 술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울고 싶어지잖아. 술 빚는 사람을 봤더니 술을 빚고 싶어지더라.”그는 전국 팔도를 돌며 술 빚는 장인들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개강 뒤에 그는 캠퍼스에 장독을 들고 와 술을 빚었다. 얼마 후 술이 잘 발효되자 친구들에게 널리 널리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그는 지역신문에 술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고무정의 방엔 과연 엄청나게 많은 술병과 장독이 있었다. 그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주었다. “이건 먹도라기주고, 이건 금정산성 막걸리고, 이건 복순도가야.” 술항아리를 정성스럽게 매만지는 고무정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이곳이 이놈의 나와바리로군.’ 그는 소풍가기 전 날 설레어 하는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술 빚는 밤을 보냈다고 말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 고고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쪽잠을 자며 술독에 신경을 썼다고.“삼매에 도달하기 위해서 명상이나 참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야.”그러니까 고무정은 만다라를 그리는 라마승처럼 술을 빚었다. 그 순간은 늘 삼매경이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주변 온도를 확인하고 몇 날 며칠간 온갖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시간. 잡균의 침투를 막기 위해 자신의 숨결조차 함부로 뱉어서는 안 되는 양조과정. 고무정이 그토록 정성스럽게 빚은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저녁을 보냈다. 내가 약간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예쁘게 포장된 술이었다. 물론 직접 담근 술. 나는 딸꾹질을 하며 물었다.“도대체 왜 사람들한테 술을 나눠주는 거야?”그가 대답했다.“다 마시고 병이나 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