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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일의 은밀한 트리트먼트] 흔들려도 좋아, 그래도…

Episode 03. 유혹과 검증

작가로서 기획은 ‘무엇을 쓸 것인가’로 시작해 ‘왜 쓸 것인가’로 끝난다. 어느 정도 스토리가 구축된 뒤에는 꼭 ‘유혹과 검증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친구여도 좋고 관계자여도 상관없고 관련 없는 사람들이어도 좋다. 기획의 매력을 뽐내 검증을 받는 단계이기 때문에 성별과 연령, 미추를 가릴 필요가 없다.

나 이런 글을 쓰려는데 어때요, 라고 넌지시 물어보는 순간(pitching) 유혹은 시작된다. 상대가 내 이야기에 빠져들면 고맙고, ‘에이, 그건 아니지. 차라리 이렇게 풀면 어때?’라며 역으로 날 유혹해도 고맙다. 물론 초지일관 심드렁한 리액션으로 ‘쓰지 마. 재미없어!’를 남발하며 절망으로 몰아넣는 분도 계시다. 처음엔 밉고 서운하지만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시나리오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고마움이 쌓여 완성된다.

<7급 공무원>

영화 <7급 공무원>을 시작할 때였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국정원 직원들의 일상을 다룬 영화라기엔 뭔가 밋밋했고 첩보액션영화라기엔 터무니없었다. 코미디라 하기엔 깊이가 없어 보였고 로맨틱 코미디라고 치자니 예산이 너무 많아 보였다. 시작부터 난관이다. 자신 없게 피칭을 시작했다. “국정원 직원들의 속고 속이는 첩보액션로맨틱코미디를 하려고 하는데요.” 반응이 시큰둥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덧대도 이것저것 조금씩 맛이나 보시라는 시식코너 같은 영화로 받아들였다.

누구를 만나 얘기해도 비슷한 반응, 방법을 바꾸어보았다. “사랑 빼고는 다 거짓말인 두 남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반응이 살짝 괜찮아졌다. 사랑과 거짓말이란 조합은 늘 있는 진부한 것이지만 사랑을 하는데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흥미 있었던 모양이다. 왜 거짓말을 하는데요? 진짜 사랑하긴 하는 거죠? 등의 질문이 돌아왔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흥미가 있다는 방증이다. 그때부터 하나씩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절대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첩보액션로맨틱코미디를.

스토리가 다시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가짜로 사는 사람들의 진짜 사랑 이야기’였다. 유혹의 과정 속에서 이야기를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오고, 그 반응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유추할 수도 있다.

드라마 <추노>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영화나 드라마나, 글이 있고 감독이 있고 배우가 있으니 같은 종족일 거라고 생각했다. 큰 잘못이었다. 처음 스토리가 나왔을 때 영화를 하던 사람과 드라마를 하던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 애초 기획은 시대 불명에, 멜로 실종이었다. 노비를 쫓을 수밖에 없는 남자의 처연한 인생을 그린 액션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명확한 시대를 지정해 현실성을 줘야 했다. 4부 이내에 남녀주인공이 키스를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도 충족시켜야 했다.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1, 2부 정도에 여주인공이 한복 입고 목욕통에 들어가는 선정성 역시 담보해야 했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 피칭은 더 미묘하고 정교해야 했다. 물리적 시간이 길고 담아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랬다. 그래도 현실적이며 환상적이고 가족적이면서도 선정적인 주문들을 다 소화할 자신이 없었다. 몇번을 쓰다 그만두었고, 다시 펼쳤다 또 접었다. 쓰고 싶은 글과 ‘드라마는 이래야 한다’와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냉정을 되찾았다. 혹시 지금 쓰려고 하는 글에 내가 유혹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유혹에 빠져 타인의 세상을 문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영상 작가’로서 자격을 잃은 것이다. 사실 작가가 지킬 것은딱 하나밖에 없다. 이 글을 왜 써야 하는지, 그것 하나.

<해적: 바다로 간 산적>

영화와 드라마를 번갈아 겪으며 쓸데없이 유혹의 기술이 늘어났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매력이 상대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쓰린 경험도 많아졌다.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을 할 때는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해양액션대작이라는 규모에 비례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난감했었다. ‘여말선초, 조선의 국새를 찾기 위한 이야기’라 하기도 했고, ‘해적과 산적의 운명적인 조우’라 말하기도 했고, ‘역사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포장하기도 했다.

가끔은 이런 과정을 건너뛰고 싶다. 일단 쓰고 리뷰를 받으면 그만인 것을 뭐가 불안해서 이러고 있나 싶다. 하지만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반복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글을 쓴다는 것은 끝날 때까지 흔들림의 연속이다. 남이 흔들지 않으면 내가 흔든다. 많이 흔들리면서 끝내 길을 잃지 않을 때 좋은 글이 나온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5백만불의 사나이>

물론 흔들리다 길을 잃은 적도 많다. 영화 <5백만불의 사나이>를 쓸 때였다. ‘존재의 부재를 다룬 영화입니다’라고 피칭을 했다. 나를 버린 세상에서 왜 살아가야 하는지를 찾는 영화였다. 아련한 느낌을 가진 슬픈 코미디이고 싶었다. 나는 살아 있다고, 나도 살고 싶다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변방의 북소리이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를 유혹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의 유혹에 빠져 ‘누명을 쓴 한 남자의 복수 코미디’로 변했다. 그리고 흥행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발로 차버렸다.

결국 시나리오가 문제였다. ‘오늘 회의 자리에서 얘기한 것으로 인해 시나리오가 잘못된다면 여기 있는 분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합니다’라는 말은 꺼낼 생각도 말자. 2009년 디트로이트 공항 항공기 테러 미수 사건 때 오바마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남을 탓할 수 없는 까닭은, 제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흔들려도 상관없다. 하지만 ‘왜 쓸 것인가’는 잊지도 말고 바뀌지도 말아야 한다. 작가는 글을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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