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중혁의 바디무비
[김중혁의 바디무비] 예술은 진통제가 아니다
김중혁(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일러스트레이션) 2014-05-29

소설가 K, 현실이라는 4D와 2D의 예술과 3D의 경험을 돌아보다

(영화 <러스트 앤 본>의 결말 부분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후각 자극보다 시각 자극에 10배 이상 예민하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는 물어볼 수 있지만, 냄새의 정체를 질문하기란 쉽지 않다. “저게 뭐야?”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어볼 수 있지만 “이 미묘한 냄새의 정체가 뭐야?”라고 묻기 힘들다. “무슨 냄새 말하는 거야? 말로 설명해봐”라고 되묻기라도 하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하나. ‘여기 이 냄새 말이야, 사하라사막의 흙냄새를 닮은 듯하고, 아마존 밀림의 나무 아래에서 나는 풀 냄새 같기도 한, 바로 이 냄새 말이야’ 같은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어쩐지 사기꾼의 말투 같다). 시각을 언어화하는 건 비교적 간단한 일이지만, 후각을 언어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미세한 형용사가 필요하다. 언어화한다고 해도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다.

인간은 시각 자극에 민감하기 때문에 속이기도 쉽다. 프랑스 보르도대학교에서 와인 양조학과 학생에게 시각과 후각에 대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첫 번째로 내놓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은 정상적인 것이었다. 두 번째로 내놓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에는 약간의 속임수를 썼다. 두잔의 화이트 와인 중 하나에다 (향과 맛이 없는) 빨간 색소를 탔고, 학생들은 색소를 탄 화이트 와인을 레드 와인이라 굳게 믿었다. 이 레드 와인은 어쩌고저쩌고, 레드 와인만의 어쩌고저쩌고 하며 첫 번째 레드 와인과 비교까지 했다. 둘 다 화이트 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은 얼마나 절망했을까. 시각의 차이가 후각의 차이를 압도한 사례라 할 수 있고, 거품으로 가득한 와인 시장을 마음껏 비웃는 실험이라 할 수도 있다. 수많은 마술의 트릭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을 믿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없으므로 쉽게 속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시각적으로 손쉽게 현혹되는 동물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기능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인간은 눈앞의 것들을 자세히 보아야만 믿는다. 예수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다. 못자국을 직접 보고, 못자국에 손을 넣고 만져본 뒤에야 믿을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인간의 두눈이 앞쪽으로 몰려 있는 것은, 쉽게 현혹당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눈앞의 물체들을 더욱 자세히 보겠다는 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인간의 숭고함일 것이다.

초원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두눈이 양쪽으로 벌어져 있어서 사방을 살핀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귀상어의 두눈은 먹잇감을 쉽게 찾기 위해 전방을 향하는 눈이 넓게 벌어져 있고, 갑오징어는 두눈이 큰 각도로 벌어져 있어서 세상을 파노라마로 보지만 갑작스런 공격을 받으면 특별한 근육이 작동하여 두눈이 앞으로 몰린다. 초원의 동물들이 수비형 눈이라면, 귀상어의 눈은 공격형이고, 갑오징어는 역습형 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간의 두눈은 관찰형일까?

우리는 눈이 두개라서 눈앞의 물체를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눈이 두개라서 세상을 입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세계적인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입체시를 상실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은 적절한 고체성과 공간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모든 것은 완전히 평면적이고 단조롭다는 사실이었다. 열린 방문 너머로 반대편 병동의 문이 있었다. 그 너머에 휠체어를 탄 환자가 한명 있었고, 그를 넘어서서 창턱에 꽃병이 하나 있었다. 그것 너머 길 저쪽에는 반대편 집의 박공이 있는 유리창이 보였다. 60m 정도 안에 있던 이 모든 것은 팬케이크처럼 납작했으며 세련되게 칠해져 있고 세부가 장식되어 있지만, 완벽할 정도로 거대한 컬러사진 틀 안에 있었다.”

영화와 사진과 그림과 소설과 시의 공통점은, 두개의 눈으로 본 입체적 영상을 평면에다 구겨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가가 입체적 현실을 평면으로 옮기는 순간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예술의 방식은 해석이 될 수도 있고, 번역이 될 수도 있고, 재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예술가의 입김이 현실에 닿는 순간 평면은 어마어마한 입체로 변한다. 그 입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현실의 입체보다 더욱 입체적이다. 예술은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고, 인간의 눈을 두개에서 네개로 만들어준다. 3D영화가 시시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극장의 스크린은 이미 그 자체로 평면이 아니다. 스크린 너머에 3D영상보다도 입체적인 공간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쓰고 눈앞에 있는 듯한 사물에 손을 뻗는 건 얼마나 시시한 일인가.

1984년, 필립 마르티네즈라는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중앙선을 넘어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왼팔이 어깨 근처에서 찢어져 있었다. 마비 상태로 1년 넘게 ‘매달려 있던’ 왼팔은 결국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필립 마르티네즈는 뇌 인지 연구소 소장인 라마찬드란 박사를 찾아가게 된다. 왼쪽 팔의 통증 때문이었다. 왼쪽 팔꿈치, 왼쪽 팔목, 왼쪽 손가락의 무시무시한 통증 때문에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른바 환지통이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필립 마르티네즈를 위해 ‘가상현실 상자’라는 것을 만들었다. 상자에는 두개의 구멍이 있다. 왼쪽 구멍에는 ‘환상 속의 왼팔’을 넣고, 오른쪽 구멍에는 오른팔을 넣는다. 상자의 가운데에는 거울이 놓여 있다. 오른팔이 거울에 비치면 사라졌던 왼팔이 보인다. 단순한 착시 효과일 뿐이지만 필립 마르티네즈는 거울에 비친 오른팔을 자신의 왼팔로 느낄 수 있었다. “오, 박사님, 세상에, 내 왼팔이 다시 붙어 있어요.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고 있어요.” 왼팔이 거기 있다는 걸 눈으로 본 순간, 통증이 사라졌다. 평면거울에 비친 상이 입체적인 왼팔로 살아났다. 어떤 환지통 환자는 절단한 손의 손톱이 계속 손바닥으로 파고 들어가는 고통을 느낀다. 손을 펴고 싶지만 손이 없다. 그 환자 역시 가상현실 상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을 펼 수 있었다. 오른손을 펴자 거울 속의 왼손도 펴졌다.

비교와 비유의 부정확함에서 비롯되는 위험함을 알고 있지만, 나는 라마찬드란 박사의 가상현실 상자가 예술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한다. 예술의 작동 원리와 가상현실 상자의 작동 원리가 다르지 않다. 예술은 거울이 되어 현실을 되비춘다.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 고통스러워 잊으려고 했던 것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늘 거기에 숨어 있던 것들을 보여준다. 진통제나 마약으로는 통증을 이겨낼 수 없다. 우리가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뭐가 있는지 두눈으로 똑똑히 봐야 한다. <러스트 앤 본>의 마지막 장면에서 호수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은 꽁꽁 언 호수의 얼음을 주먹으로 내려친다. 얼음 너머로, 물밑으로, 아들의 붉은 외투가 보인다. 방법은 없다. 눈앞에 아이가 있다. 얼음이 부서질 때까지 내려쳐야 한다. 영화라는 거울을 보면서 나는 주인공과 함께 얼음을 내려쳤다. 간절한 마음으로 사력을 다해, 함께 얼음을 내려쳤다. 아직도 주먹이 얼얼하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