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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유는 다 어디로 갔는가
안시환(영화평론가) 정리 임정범 사진 오계옥 2014-06-17

<경주>와 장률 감독, 안시환 평론가의 질문에 답하다

<경주>는 <두만강> 이후 장률이 4년 만에 선보이는 극영화다(두 작품 사이에 <풍경>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긴 하다). 제일 먼저 찍고 싶었던 <두만강>을 완성한 뒤 그는 영화를 그만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두만강>이 그의 영화 인생에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면, <경주>는 그 매듭을 풀어 새롭게 자신의 영화 인생을 시작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경주>는 경계 위에 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장률의 이전 영화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춘화를 찾기 위해 경주의 한 찻집에 들른 베이징대 교수 최현(박해일)과 그곳에서 만난 찻집 주인 공윤희(신민아)는 그의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미묘하게 변하는 감정선의 리듬 역시 그렇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좀더 넉넉해진 시선과 엉뚱한 유머, 아름다운 풍경이 함께하는 <경주>에서 장률의 변화를 읽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주>는 장률의 영화다. 그는 여전히 장소에 자신의 감각을 열어놓은 채, 장소가 주는 인상을 영화에 스며들도록 한다. <경주>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달리 말하면 삶의 충동과 죽음의 기운이 모호하게 뒤섞인 경주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은 경주에 대한 이방인의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놓쳤던, 또는 무심히 지나쳤던 경주는 장률의 감각을 통해, 그렇게 되살아난다.

안시환_<경주>에서 춘화를 찾는 여정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장률_춘화를 잘 보면 그 안에 공간이 보인다. 야동은 공간이 안 보인다. 행위밖에 없다. (웃음)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고 할까. 공간이 보인다는 것은 여유가 보인다는 것이고,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고, 사람들이 보인다는 거다. 공간의 느낌이 없으면 춘화가 되지 않는다.

안시환_춘화에 대해 느꼈던 그런 인상을 경주와 연결할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나.

장률_95년에 한국에 와서 대구의 아는 두 형과 함께 경주에 처음 갔는데, 경주라는 지역이 너무 특이했다. 능과 일상이 공존한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찻집에 갔는데, 누가 봐도 찻집과 경주가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 찻집의 춘화는 좀 뜬금없었다. 찻집에서 춘화를 보는 게 좀 어이없어 보였다고 할까. 그런데 그게 점점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춘화 안에는 공간이 보이고, 섹스를 해도 여유가 있고, 무덤의 사람들도 다 해본 사람이고, 우리도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하고. 그런데 그 여유는 다 어디 갔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안시환_아리솔 찻집은 감독님의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공간이다. 실외의 정원과 실내가 조화롭게 구성된 찻집의 공간적 특성을 영화의 구도로 너무나 잘 담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장률_내가 아름답게 찍었다기보다는 그 공간 자체가 그냥 아름다운거다. 찻집 안에는 방의 구조가 좀 다양했는데, 아무래도 장소를 찾아간 계기가 춘화니까 춘화가 있던 방을 중심으로 실내와 실외를 볼 수 있도록 전체적인 구도를 잡았다. 명확하게 어떤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각 방에서 오는 느낌이나 밖에서 안을 볼 때나 안에서 밖을 볼 때의 느낌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려는 대략 큰 원칙만 있었다.

정원, 집, 그리고 빛

안시환_주로 자연광을 이용한 것 같은데, 실내와 실외의 정원, 그리고 정원에서 실내로 들어오는 빛이 찻집에 신비한 분위기를 감돌게 하기도 한다.

장률_정원이 있는 집이라는 게 중요하다. 정원 있는 집은 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가 중요하다. 정원을 잘 보면 어떤 순서가 있다. 그 느낌이 아파트와 전혀 다르다. 조명도 쓰기는 했지만 자연광의 원칙으로 만들었다. 정원과 방의 빛의 차이도 중요했고, 빛이 시간에 따라 변하고, 또 그게 사람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영화에 비가 왔다가 서서히 개는 장면이 있다. 그 빛의 변화로 두 남녀의 관계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빛과 사람간의 관계의 리듬을 따라가면 영화에 설득력이 생긴다. 아주 아름다워도 설득력 없는 빛도 있다. 그것과는 다르다.

안시환_최현과 공윤희는 지금까지 감독님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인물처럼 보인다. 인물들에게 필요한 말만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전 영화에 비해 무의미한 말들의 비중이 늘었고 엉뚱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행동도 많다. 그것이 감독님의 어떤 변화처럼 보인다.

장률_의도한 것은 아닌데, 인물에서 출발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사실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이전의 인물들은 엉뚱한 면이 나오는 게 맞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엉뚱하다는 것은 여유가 있다는 건데, 그들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어렵고 보통은 침묵이 유지된다. 전에는 인물을 설정할 때 그런 면을 넣고 싶었어도 다 뺐었다. 인물과 맞게 가는 게 중요한 거니까. <경주>는 인물이 다르지 않나.

안시환_이 영화에서 직접적인 에로틱한 장면은 없지만, 은근하게 에로틱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있다. 공윤희가 물에 손가락을 넣어 금붕어에 장난칠 때 최현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이나 공윤희가 닫았던 문을 살짝 열어두는 장면 등이 그렇다.

장률_공윤희가 물에 손을 넣는 장면 전에 최현이 후 하고 물을 부는 장면이 있다. 그걸 공윤희가 보고 따라한 거다. 그리고 그걸 최현이 보고 있는 거고. 일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는 행동들이 있다. 공윤희가 최현의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한다는 건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게 있다는 거다. 사실, 물속에 손을 넣는 동작 하나만 보면 이상하기도 하고 좀 섬뜩한 느낌도 있었데, 좀더 큰 화면으로 보면 아름답게 느껴진다. 부분으로 보는 것과 좀 나와서 크게 보는 건 느낌이 다르다.

안시환_경주의 능을 처음 소개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능 앞에서 남녀 고등학생이 키스를 한다.

장률_그 장면은 우연히 나온 것이다. 찻집 찍다가 그곳에서 쉬기도 하고 고민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능 앞에서 학생들이 연애를 많이 한다. 어린애들이 연애를 하는데 그 뒤에는 죽음이 있는 거다. 그런데 거기에 또 유치원 애들이 몰려 오는 거다. 눈이 카메라이지 않나. (웃음)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래서 순간순간 섭외해서 찍었다. 영화를 찍는다는 건 실제 그 공간에 있는 것과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을 찍는 것이기도 하다.

안시환_<경주>에서 이러한 느낌의 장면이 특이할 수 있는 건 그것이 경주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능 앞에서 펼쳐지는 에로틱한 상황이라는 게 뭔가 묘하다. <경주>는 삶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기운이 묘한 긴장 관계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장률_삶과 죽음의 공존이 어색할 게 없는 곳이 경주다. 어딜 가도 능이 있는 곳이니까. 우리가 그걸 나눠 봐서 그렇지. 이게 다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죽은 선배의 부인이 찻집에 찾아오는 최현의 백일몽을 현실과 구분하지 않고 한컷으로 처리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걸 컷으로 나누면 백일몽과 일상이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래서 한컷으로 가는 것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백일몽에 빠져드는 우리 모습이나 현실과 백일몽의 모호한 경계를 재밌게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시환_최현이 계속 사진을 찍는 설정도 경주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경주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할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도시이지 않나. 이런 면에서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미학적 매체인 사진과 경주는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장률_말씀은 되게 고맙고(웃음), 들어봐도 맞는 것 같은데, 촬영할 때 그런 생각은 없었다. 동북아 정치를 전공하는 교수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교수 같지 않은 행동을 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현장에서 넣었다. 한번 넣으니까 다른 장면에서도 어떻게 넣을까 생각하게 되고. 현장은 순간순간 재미있는 것이 나올 때 그것을 다른 장면과 어떻게 연계해주는가가 중요하다. 그게 잘 나오면 평론가가 좋은 말씀을 해주는 거고. (웃음)

한잔하고 하세, 라고 말하는 그런 여유를

안시환_<경주>에서도 갑작스러운 죽음의 돌출은 여전하다.

장률_춘화가 있던 찻집에 함께 갔던 사람들은 이미 다 고인이 돼버렸다. 시나리오가 거기서 출발한 거니까 아무래도 죽음이라는 게 따라오는 것 같다. 경주는 죽음이라는 것도 참 평화롭게 보이는 도시지만,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 벌어지는 것이 실제 일상이지 않나. 그런 잡스러운 생각이 경주라는 공간에서 떠오르더라. 영화를 찍다보면 실제 공간이 나한테 영향을 준다.

안시환_실제 공간이 영향을 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좀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

장률_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 내가 일부러 경주의 느낌을 찾는다든가 만든다든가 하기 전에 말이다. 영화를 찍을 때는 컷과 컷이 어떻게 넘어가고, 이걸 한컷으로 완성할까, 아니면 한 부분 보여주고 더 큰 부분을 이어 보여줄까, 하는 것들이 몸으로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처음에는 모호했는데 찍다보면 내 몸에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고, 그때 기쁜 것이 나온다. 실제 찍을 때는 그렇게 생각을 많이 안 한다.

안시환_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이전 영화에 비하면 초호화 캐스팅인데. 이준동 대표나 송호창 의원 등의 카메오만 봐도 그렇다. 무엇보다 류승완 감독의 여성스러운 연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장률_류승완은 남성적인 사람이지 않나? 영화도 그렇고.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던 부분을 집어내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쪽인 것 같다. 그의 연기에 만족한다. 류승완이 영화 끝나고 하는 말이 자기 애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더라. (일동 웃음) 신민아는 처음에는 스스로 근심이 있었다. 자기가 찻집 여주인으로는 좀 튀지 않겠는가, 하는. 나는 딱 봐서 찻집 주인 같은 배우를 캐스팅하기는 싫었다. 만나보니 아주 소박한 배우였다. 소박하다는 건 깊이와 넓이가 있다는 것이지 않나. 예전에는 모던하다는 인상만 있었는데 실제로 내용이 있더라. 자기 리듬이 있고 조급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당신은 신민아씨 연기를 어떻게 봤나.

안시환_처음에 신민아씨가 찻집 주인이라고 해서 좀 의아했다. 그런 분위기의 배우는 아니니까. 그런데 보통 차라는 것이 우려내면서 맛을 내지 않나. 처음에는 좀 어색한 느낌이 있었는데, 차를 내리는 행동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찻집 주인의 느낌이 묻어났다. 공윤희의 엉뚱한 면은 신민아 특유의 발랄함으로 살리고 차의 차분하면서 그윽한 면을 그 위에 새롭게 얹힌 느낌이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다음 작품 계획이 있다면 어떤 분위기에 가까울 것 같나? <두만강>인가, <경주>인가?

장률_나도 궁금하다. 계획은 없고, 지금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꼭 되진 않을 거 같다. 원래 남자 말은 믿을 게 못된다.

안시환_오늘 들은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인 것 같다. (웃음) 마지막 질문인데,<경주>에 관해 인터뷰하면서 감독님이 제일 많이 썼던 단어가 여유다. <두만강>을 찍고 영화를 그만할까 생각했다는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다. <경주>를 찍으면서 여유를 좀 찾았는지?

장률_내가 여유라는 단어를 많이 썼나. 한국 단어가 풍부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은데…. (웃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여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춘화에 글귀가 있지 않나. 그게 선조들의 여유일 거다. 한잔하고 하세, 라고 말하는 그런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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