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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나 졸리] <말레피센트>
정지혜 사진 최성열 2014-06-17

안젤리나 졸리

“야생적인 아이.” 데뷔 초기 안젤리나 졸리를 처음 접한 미디어의 이 표현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파워 넘치는 여전사로 2000년대 할리우드를 종횡무진 내달리기 이전, 안젤리나 졸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누구에게 길들여지거나 어디에 순응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달까. 동물적인, 그래서 더 관능적인, 날것 그대로의 졸리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HBO>의 TV영화 <지아>(1998)는 이런 졸리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그녀는 “짐승 같았고”, “활화산같이 생겼”으며 그래서 “육감적”이라는 말을 듣던 실존 인물인 모델 지아 카란지를 거의 완벽하게 체화했다. 이 정도의 싱크로율은 지아와 비슷한 성장 과정을 겪은 졸리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짐작된다. 배우인 부모의 이혼, 아버지 존 보이트에 대한 원망, 가난한 유년기를 통과하며 졸리는 방황했다. 20대 초반까지 마약을 경험하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그녀는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칼을 모으는 기이한 취미도 모자라 그녀는 “나를 베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감정을 발산한다”라고 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다가 장의사에 관심을 보이며 장의사 자격증까지 취득하는 괴짜 같은 ‘실천력’이 그녀를 계속 삶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처럼 아픔을 겪는 지아를 만났고 그녀는 <지아>에 더없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이 영화는 7살 때 <라스베가스의 도박사들>(1982)로 데뷔한 그녀에게 처음으로 골든글로브와 미국배우조합상의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이듬해 <처음 만나는 자유>(1999)에서도 그녀는 정신요양병원의 입퇴원을 반복하는 리사 역으로 다시 한번 폭발적인 연기력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녀의 이미지이기도 한) 여전사로 태어난다. 액션 스타 안젤리나 졸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앞선 작품들에서 보여준 거칠고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불안함 대신 그녀는 한층 굳세어졌다. <툼 레이더>(2001)는 그 원년이 돼준 작품이다. 몸에 착 달라붙는 탱크톱에 짧은 핫팬츠를 입고 허리춤에 쌍권총을 찬 글래머러스한 라라 크로프트의 졸리라니. 그녀는 날렵하고 우아하며 박력 넘치는 액션으로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해 들어간다. 이 영화로 그녀는 단숨에 전세계적인 액션 히로인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녀에게 대중적 관심과 흥행의 맛을 보게 한 것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거의 교류하지 않던 아버지 존 보이트가 극중 아버지인 리처드 크로프트 역으로 등장해 잠시나마 그녀와 재회한 건 (그 뒤로 다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됐지만) 그중 하나다.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은 촬영차 방문한 캄보디아에서 그녀가 전쟁으로 삶을 송두리째 잃은 사람들을 보고 느낀 충격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졸리는 직접 유엔에 연락해 현지 난민들의 상황에 대해 물었고,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그녀는 현재 유엔난민기구의 특사로서 전세계 난민 캠프를 방문하며 인도적 지원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실천가가 됐다. 처음으로 입양한 아들 매덕스가 캄보디아 출신이라는 것도, 그녀가 현재 캄보디아 시민권자라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여기서부터다.

이후 그녀는 총과 칼은 기본으로 다루고, <툼 레이더: 판도라의 상자>(2003), <원티드>(2008), <솔트>(2010) 등을 거치며 곡예에 가까운 카체이싱과 달리는 차 위로 몸을 던지는 거침없는 액션을 보여줬다. 물론 파트너 브래드 피트를 만난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도 그녀의 주요 작품군에서 빠질 수 없다. 일련의 액션영화 속에서 파워와 유연함을 두루 겸비한 그녀의 남다른 액션감은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건 졸리야말로 액션영화에서 극을 견인하는 독보적인 여배우라는 점이다. 액션물이 클리셰처럼 여배우를 소구하는 방식, 즉 섹시 어필용으로 여배우를 남자배우 옆에 슬쩍 세워두는 일에 장단을 맞출 그녀가 절대 아니다. “나는 여배우의 전형적인 역할을 깰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해온 졸리가 아닌가. 그녀는 원톱 혹은 상대 남자배우와 나란히 서서 극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나간다. 원래 남자배우가 주인공이었던(심지어 톰 크루즈가 물망에 올랐던) <솔트>의 시나리오는 결국 졸리 맞춤형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으니 말 다 했다. 안젤리나 졸리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가진, 혹은 그 구분법을 무용하게 만들어버리는 능력의 소유자다.

“나는 적어도 어느 정도 내면의 힘을 가진 캐릭터에 끌린다.” 졸리의 말대로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깊은 심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아들을 잃고서도 끝내 희망을 말하는 <체인질링>(2008)의 콜린스, 황폐해진 육신을 가졌지만 “난 살아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처음 만나는 자유>의 리사만 봐도 그렇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 부단히 애쓰는 그녀의 캐릭터들은 실제로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새로운 것을 탐험하지 않으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우리에 갇힌 듯한 기분이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게 내가 가진 욕구다.” 이것이 곧 그녀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자 안젤리나 졸리라는 사람을 움직이는 원천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변화의 중심에 세우길 주저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또 다른 변화를 추동해가는 결단력까지 보여준다.

새로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나가는 졸리에게 <말레피센트>(2014)는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었을 게 자명하다. “선 아니면 악이라는 식의 구분으로 만들어진 해피엔딩에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라는 졸리라면 더더욱. 원작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와 달리 말레피센트가 사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덧붙인 <말레피센트>에서 그녀가 시도해볼 연기의 스펙트럼은 더 넓어졌다. 사랑의 배신에 분노하면서도 또다시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쏟아붓는 요정, 남성 전사들로 득시글거리는 인간 세계에 맞서 요정 세계인 무어스를 수호하는 절대자, 움푹 팬 양볼, 그만큼 더 도드라지는 광대, 고대부터 악마를 상징한 두개의 뿔, 위압적인 검은 날개로 무장한 마녀까지. 졸리는 이 복합적인 인물을 솜씨 좋게 제 것으로 주물러냈다. <말레피센트>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말레피센트의 졸리는 인상적이다. 게다가 실제로는 여섯 아이의 엄마인 졸리가 “난 어린애는 질색이야”, “난 네가 싫어, 이 괴물아”라며 어린 오로라에게 쏘아붙이듯 말하는 장면은 관객에게는 또 다른 재밋거리다. 심지어 오로라 역의 아역은 졸리의 친딸 비비안이 아닌가. 이 사악하고 귀여운 마녀 엄마 졸리,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최근 그녀는 은퇴설에 휩싸였다. 현재 촬영 중인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배우 활동보다는 연출과 각본 작업 그리고 유엔 활동에 집중하고 싶다는 그녀의 발언 때문이다. 졸리는 올해 크리스마스에 두 번째 연출작 <언 브로큰>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아직 어떤 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브래드 피트와 협업으로 진행될 영화의 각본도 쓰고 있다. 납치된 소녀가 성폭행을 당하는 에티오피아산 영화 <디프렛>의 총괄 제작자로도 합류한 상태다. 어린이 유괴나 전쟁, 성폭력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온 그녀의 행보와 연결되는 작업이다. 얼핏 봐도 졸리가 그리려는 삶의 지도는 배우로서 그녀가 구축해온 세계보다도 훨씬 방대하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라고 말하고, 또 말한 대로 행동하며 살아온 졸리라는 걸 기억한다면, 그녀의 세계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지금으로서 누가 알 수 있을까.

magic hour

문신을 새기듯 쓴 이름

<지아>의 지아는 누가 먼저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다리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먼저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원하는 바를 똑똑히 말한다. 그런 지아가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리셉셔니스트에게 가서는 평소 몸에 지니고 다니던 나이프로 그녀의 책상에 제 이름 ‘GIA’를 새겨넣는다. 그리고 한마디, “내가 왔다고 전해줘”. 이 섬뜩하고 사랑스러운 장면은 흡사 안젤리나 졸리를 향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칼끝으로 자신의 존재를 새겨넣는 지아의 행동이 타투를 즐기는 졸리와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졸리는 현재의 자신을 만든 사람들, 어머니, 아이들, 파트너와 관련된 상징을 몸에 각인해뒀다. 한때 졸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겠다는 의미로 창문을 몸에 새겼고, 자신이 올바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판단했을 땐 그 창문을 호랑이 문신으로 덮어버렸다. 지아가 라이더 재킷에 부스스한 머리로 “숙녀를 찾았다면 여기까지 안 왔다”라고 말하는 이 장면만큼은 지아와 졸리, 둘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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