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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스 일레븐>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김혜리 2002-02-27

“영화만들기는 지뢰 가득한 벌판을 통과하는 것”

과거에 그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었건, 2002년 현재 스티븐 소더버그는 주류 할리우드 제1급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인디와 메인스트림 양쪽 진영을 향해 영구 중립을 선언하고, 포커 테이블에 앉은 ‘꾼’처럼 조용히 이분법을 무너뜨려가는 전략으로 지금의 의자를 차지했다. 3월1일 개봉하는 그의 신작 <오션스 일레븐>은 범죄영화를 매만지는 그의 숙련된 솜씨와 스타의 육체에 신선한 피를 돌게 하는 재주를 마음껏 자랑한 영화다. 8500만달러짜리 오락영화를 만들면서도 특유의 근면함과 기동력을 잃지 않았다. 일요일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트래픽> 촬영을 마친 이튿날 캘리포니아 버뱅크로 날아와 점심을 먹으며 <오션스 일레븐>의 시나리오를 수정했던 그는 지난해 3월 오스카 시상식 이튿날 새벽 6시부터 라스베이거스 현장에서 ‘액션!’을 외쳐 소더버그의 감독상 수상을 핑계로 밤새 축배를 들며 여유를 부렸던 <오션스 일레븐> 팀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에린 브로코비치> <트래픽>에 이어 피터 앤드루스라는 가명으로 촬영감독 겸업도 계속했다. 소더버그가 당분간 팔자에 없는 게으름을 억지로 피워야 할 일은 없을 듯. “스티븐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밀림에라도 따라가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 줄리아 로버츠와 같이 찍는 <풀 프론탈>, 조지 클루니, 캐서린 제타 존스를 기용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리메이크가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현재 조지 클루니와 설립한 프로덕션 섹션 에이트를 꾸려가고 있으며 스파이크 존즈, 데이비드 핀처, 알렉산더 페인 등과 함께 끌어갈 감독 중심의 새 영화사 구상에도 참여하고 있다.

<오션스 일레븐>은 리메이크다. 어떻게 당신의 개성을 불어넣었나.

나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매우 고전적인 혈통, 즉 1940년대 영화의 번쩍거리고 야한 스타일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욕설도 폭력도 없었고 실제로 권총조차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 끌렸다. 나는 마침 아주 하드한 영화(<트래픽>)를 완성한 참이었고, <오션스 일레븐>은 괜찮은 전환처럼 보였다.

스타일 측면에서 소재에 어떤 식으로 접근했나.

나는 <오션스 일레븐>이 스타일리시한 영화가 되길 바랐으나, 스타일이 너무 튀어 관객과 영화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션스 일레븐>은 정보가 조금씩 드러나는 방식이 매우 중요한 영화인 만큼, 이야기의 전개와 정보의 시각적 전달이 다같이 정확하고 일관되기를 원했다. <오션스 일레븐>은 모종의 추진력을 내장하고 있지만 숨가쁘거나 열에 들뜬 영화는 아니다. 말하자면 내가 원한 건 일종의 우아함이었다.

오스카 수상자라는 새로운 경력이 보탠 중압감이 있었나.

아니다. 그저 내 스스로 훌륭한 영화를 원해서 자신에게 부과한 부담감이 있었을 뿐이다.

<오션스 일레븐>을 연출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내가 도달하고 싶었던 기술적 세련됨을 성취했다고 판단한 많은 영화를 봤다. 결과적으로 내 손에는 초기 스필버그의 작품 여러 편과 데이비드 핀처의 모든 영화, 존 맥티어넌의 영화가 남았고 그들의 시퀀스 레이아웃을 분석했다. 촬영중에도 나는 밤마다 이 영화들의 비디오를 끊임없이 반복 시청하며 그 감독들이 어떤 종류의 렌즈를 썼고 카메라를 어디에 세웠고 어디쯤에서 커팅하고 배우들을 어떤 식으로 배치했는지 연구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감을 잡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좀더 세련된 감독이며 나는 캐릭터에 이끌리는 연출자에 가깝다는 뜻이다.

<오션스 일레븐>에서 인용한 영화들의 목록을 말해달라.

하워드 혹스와 조지 쿠커의 영화들을, 예컨대 <대탈주>나 <황야의 7인> 같은 영화보다 더 열심히 봤다. 그러니까 강도를 소재로 한 영화보다 혹스나 쿠커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는 일종의 클래시컬한 느낌을 의도했지만 동시에 동시대적인 느낌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10년 뒤의 관객이 “딱 2001년 스타일인데?”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의 느슨한 동시대성을 원했다.

<트래픽>은 스토리라인이 겹치고 액션의 시간대가 교직된 옷감 같은 영화였다. <오션스 일레븐>에서도 그런 스타일을 생각해봤나.

아니다. 내 생각에 이야기의 교차와 시간의 전환은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영화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낮 시간에 이리저리 걸어다니다보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옛날 일과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뒤섞는 것은 인간정신의 자연스런 작동이므로 영화로 그 과정을 모방하기도 쉽다. 하지만 영화에 따라 적합한 스타일이 따로 있다. <오션스 일레븐>은 특수기동대 출동과 관련된 플래시백 하나만 제외하면 대체로 한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라스베이거스는 하나의 등장인물이나 다름없다. 현장은 어땠나.

오리지널 <오션스 일레븐>은 놀랄 만큼 라스베이거스라는 공간의 색깔을 적게 활용했다. 라스베이거스는 매우 기묘한 장소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절정을 맛보고 바로 나락을 경험한다. 그 극단적 공기는 언제나 당신을 에워싸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는 전형적으로 미국적인 동시에 과장되어 있는 장소다. 촬영중에 도박할 시간이 있었냐고? 한번도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스튜디오의 돈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웃음)

<오션스 일레븐>을 오리지널처럼 일종의 ‘패밀리영화’로 만들 생각을 해본 적 있나.

오늘날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오리지널의 인물들은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엔터테이너들이었다. 아니, 옛 <오션스 일레븐>의 출연자 중 대부분은 먼저 엔터테이너로 시작해서 뒤에 배우가 됐다. 라이브 공연자는 반응을 즉석에서 얻지만 영화배우들은 기다려야 한다. 그건 큰 차이다.

어떻게 이 많은 스타들의 동참을 끌어냈나.

조지 클루니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나와 전 과정을 같이했다. 우리 둘은 많은 스타를 참여시키면 바람직하지만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렇게 많은 스타의 출연료를 감당할 영화는 없을 테니까. 그러자 조지는 “내 출연료를 깎겠어.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같은 비율로 출연료를 삭감하는 타개책을 고안해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결국 모두가 똑같은 조건을 받아들였고 조지는 참으로 큰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다. 스튜디오에 큰돈을 절약시켜주지 않았나.(웃음)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는 잘 지냈는지.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명백했고 하나의 프레임을 기꺼이 공유하는 그들의 관계를 나는 실컷 이용했다. 두명의 영화스타가 그처럼 편안하게 함께 있는 광경을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열한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또렷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다.

제작과정에서 늘 관객을 염두에 두었나.

물론. 나는 관객과의 관계를 자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즐겨 빗댄다. 우리는 아이의 행복에 관심을 갖지만 그것은 아이의 모든 변덕과 욕구를 맞춰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이들을 늘 의식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조지 클루니의 감독 데뷔를 어떻게 돕고 있나.

영화를 하나 만드는 것은 지뢰가 가득 묻힌 벌판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저 그에게 어디에 지뢰가 있는지 지도를 그려주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인디영화보다 스튜디오영화를 만드는 게 쉬운가.

작품에 따라 다르다. 만약 만들고 싶은 영화를 갖고 있다면 스튜디오와 일할 경우 대답을 더 빨리 얻게 된다. 이른 시간 안에 가능 여부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트래픽>과 <오션스 일레븐>에서 촬영감독으로 일했다.

카메라를 직접 들 때 장점은 영화에 대한 밀착도가 높아지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촬영감독으로서 내가 얼마나 잘해낼 수 있느냐는 또다른 차원의 고민이다. 다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존경하는 촬영감독이 많지만 나로서는 옛날로 돌아가 다른 촬영감독과 일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이제 이런 식의 필름메이킹은 내게 아주 유기적인 과정이 돼버렸기에 중간에 누군가를 끼워넣는 것은 쉽지 않다. 예컨대 지금 만들고 있는 새 영화와 올 봄에 만들 영화의 비주얼을 나는 예전에 비해 훨씬 이른 단계부터 마음속에 그리게 됐다.

자신의 영화 만드는 스타일을 묘사한다면.

나는, 매우 독창적인 언어를 가지고 영화의 풍경 자체를 바꿔버리는 구로사와나 베리만, 펠리니, 큐브릭, 알트만과 같은 감독 중 하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 나를 모방하려고 노력한다면, 아무도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감독이 못된다.나는 손에 주어진 소재를 들여다보며 이 소재를 다루기 위해 어떤 종류의 감독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가늠하고 시도하는 감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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